The Name of the Game, Football





안녕하세요. 덕왕입니다.
6월 12일 오전, 멕시코 과달라하라에서 펼쳐진 대한민국 대 체코의 A조 조별리그 1차전에서 대한민국이 좋은 경기력으로 체코에 2대 1로 역전승을 거두었습니다. 후반 59분 주장 크레이치에게 롱스로인 헤더를 허용할 때만 해도 "또 시작인가" 싶었지만, 그 이후부터 오히려 경기력이 더욱 살아났습니다. 전반에만 슈팅 15개를 퍼붓고도 기회를 줄줄이 놓치던 한국이, 67분 황인범이 이강인의 침투패스를 받아 슛 페이크로 체코 수비 둘을 벗겨낸 뒤 골키퍼 키를 살짝 넘기는 칩슛으로 동점을 기록하던 순간은 ‘아니 한국에 이런 식의 아름다운 득점이 있었던가!’하는 감탄을 자아냈으며, 80분 그 황인범이 오른쪽에서 올린 크로스를 오현규가 마무리하며 역전골을 꽂았을 때는 마치 누텔라에 처음 빵 찍어먹었던 초등학교 시절의 짜릿한 기분을 다시 느끼는 듯했습니다. 전반을 다 이기고도 0대 1로 끌려간 팀이 후반 13분 사이에 경기를 역전시킨 사건은 우리가 알던 전형적인 한국 축구에는 없는 공식이었으니까요.
이렇게 4년마다 우리의 마음을 바운스 바운스, 부장님께 들킬까 봐 겁나게 만들어주는 이 거대한 잔치는 대체 어떤 서사를 가지고 있으며 누구의 돈으로 차려지고, 결국 누구 주머니로 들어가는 걸까요? 4년에 한 번, 전 세계가 공 하나에 울고 웃는 동안, 정작 감정너머 장부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요?
이번 시간에는 흔한 ‘공’ 하나 사이에 울고 웃으며 지구촌을 들썩이게 만든 월드컵에 얽힌 여러 사건들과 월드컵의 진짜 의미, 그리고 축제 속에 숨겨진 주인공의 이름과 함께 데이터와 프로세스로 움직이는 이 시대에 절차도 없이 패스트푸드점을 회의실 삼아 어디서든 굴러가는 어떤 나라 축구협회의 노마드 같은 이야기도 다뤄보겠습니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킥 오프!
"the name of the game"이라는 유명한 월드컵 노래가 있습니다. 월드컵 하면 떠오를 정도로 매우 유명하고 엄청 신나는 곡인데 삐딱한 시선으로 살펴보면, 축구의 이면에 숨겨진 의미를 생각하게도 만듭니다. 그게 무엇인지는, 이번 시간의 이야기를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으며, 우선 이번 대회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살펴보도록 하지요.
2026년 북중미 월드컵 한 방 정리
한마디로, 더 커지고, 더 길어지고, 더 비싸진 대회입니다.
TMI: 이번 2026 대회부터 바뀐 규정들
1. 48개국, 104경기로 사상 최대 규모: 직전 32개국 64경기에서 대폭 확대되었습니다. 그래서 조별리그가 4개국 12개 조로 재편됐으며, 기존 조별리그 1, 2위가 올라가던 16강이 사라지고 조 3위까지도 진출가능한 32강(라운드 오브 32)이 새로 생겼습니다.
2. 최장 대회 기간 39일: 출전국과 경기수가 많아지면서 경기일이 한 달 이상으로 길어지고 경기 간 휴식이 일주일 정도로 넉넉해졌습니다.
3. 사상 첫 3개국 공동개최: 두 나라가 공동개최한 적은 제법 있었지만 세 나라가 같이 개최한 적은 처음입니다. 덕분에 국경을 넘나들며 웬만한 대륙 횡단만큼 이동거리가 늘어난 팀도 많습니다.
4. 티켓 가격 동적 가격제 최초 도입: 항공권처럼 값이 출렁이는 주식 가격 같은 동적 가격제가 처음으로 도입되었습니다.
5. '시간 끌기' 방지 강화: 골키퍼가 공을 8초 이상 잡고 있으면 상대에게 코너킥을 주는 규칙도 새로 들어왔습니다. 기존 6초 규정이 사실상 사문화되자 아예 8초로 못 박고 페널티를 바꾼 것이지요. 그 외 선수교체나 드로잉 지연에 대한 규정도 크게 강화되어 이제 침대 축구는 불가능해졌습니다.
1차전을 승리한 우리에게는 6월 19일 오전 10시 멕시코전, 6월 25일 남아공전이 남아있습니다. 직장인에게는 잔인하리만치 정직한 평일 오전 편성이지만, 그 어떤 상황에서도 답을 찾아내는 여러분들은 어떻게든 본방을 사수하시리라 믿습니다. 설레발은 필패지만 멕시코가 왠지 홈구장으로 느껴질 만큼 분위기도, 호응도 좋으니 일단 마음은 가볍습니다.
우리나라의 베이스캠프이자 첫 경기가 펼쳐진 도시이자 승리의 성지인 과달라하라에는 재미있는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과달라하라와 인근 도시 과달루페, 그리고 태평양전쟁 시절의 격전지 과달카날도 다 '과달(Guadal-)'로 시작하는데 이건 단순한 우연이 아닌, 8세기부터 약 800년간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한 이슬람 세력의 흔적으로, ‘강’ 또는 ‘계곡’을 뜻하는 아랍어 아랍어 '와디(wādī)'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후 스페인 정복자들이 그 지명을 아메리카로 그대로 들고 와, 중남미 여러 곳에 ‘과달’의 이름이 붙었습니다. 과달라하라 (Guadalajara)는 '돌(자갈)이 많은 강'을 뜻하며, 과달루페 (Guadalupe)는 ‘늑대의 강’을, 그리고 과달카날 (Guadalcanal)은 ‘수로가 있는 강가’를 뜻합니다.
TMI: 묻지마 돌격의 비극, 과달카날 전투
이 중에서 과달카날은 중남미와는 전혀 관계없는 남태평양의 작은 섬인데, 태평양 전쟁시절 미국과 일본이 피 터지게 싸우며 유명해진 곳입니다. 일본군은 진주만 공습 이후 반년 간 연전연승을 거듭했습니다. 이에 고무된 일본 해군은, 연합국 주력 함대와 결전을 벌여 승리하는 것만이 전쟁을 조기종결시킬 수 있는 유일한 해법으로 보았고 이에 남태평양 너무 호주 근처에 있는 솔로몬 제도를 점령하고 비행장을 건설했습니다. 이를 용납할 수 없던 미국은 즉각 솔로몬 제도 과달카날 섬에 해병대를 투입시켜 완공을 앞두고 있던 일본 해군의 비행장을 점령했습니다.
일본의 대본영은 이를 인지하고 과달카날 탈환을 명령했습니다. 이미 중무장하고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1만 명이 넘는 미군을 상대하려면 그보다 훨씬 높은 화력과 보급이 필요합니다. 자고로 수성보다 공성에는 훨씬 많은 인력과 장비가 필요한 법이니까요. 그러나 일본군은 오만에 빠져 ‘경보병’을 투입했고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전까지 그들은 중국군과 말레이 반도의 영국군, 그리고 필리핀의 미군까지 격파하여 기세가 등등했고 스스로를 ‘무적의 황군’이라 불렀을 정도였습니다.
백병전을 자신한 일본군과 이 작전을 지휘한 일본육군 제28 연대장 이치기 키요나오 대좌
과달카날에 상륙한 일본군은 정찰대를 보냈으나 실패했고,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만함은 정보도, 전략도, 전술도, 보급도 없는 상태에서 기세로 이길 수 있다는 묻지마 돌격으로 이어졌는데, 당시 일본군 지도부는 깊은 밤 일본군 병력이 총검을 들고 돌격하게 되면 미군이 혼비백산하여 궤멸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이 전략은 여러 전선에서 효과를 보았기에 군 지휘관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칠 것이라던 미군은 오합지졸이 아니라 만반의 준비를 갖춘, 해병대 중에서도 정예병력이었습니다. 이 오판으로 일본군 3만 1,000여 명 중, 5,000명이 전사하고 1만 5,000명 이상이 기아나 질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추정) 이런 명백한 실패에 대해 일본군 지도부는 어떠한 반성과 성찰도 하지 않았으며, 이는 일본군의 태평양 전선에서 급격한 몰락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번 대회의 가장 큰 변화는 출전국이 32개국에서 48개국으로 늘었다는 것입니다. 경기 수도 64경기에서 104경기로 62퍼센트나 불었지요. 덕분에 "이런 나라도 월드컵에 나와?" 싶은 팀들이 대거 등장했습니다. 이들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사상 처음 본선을 밟은 '데뷔국'과, 데뷔는 아니지만 수십 년 만에 돌아온 '복귀국'이지요.
먼저 데뷔국 네 나라를 보겠습니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퀴라소입니다. 인구가 고작 15만 6천 명. 월드컵 출전국 사상 최소 인구로, 직전 기록이던 아이슬란드(약 35만 명)의 절반도 안 됩니다. 인구 8,400만 독일과 한 조(E조)에 묶였으니, 32개국 체제에서는 상상도 못 할 매치업이지요. 감독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2006년 우리나라 대표팀을 이끌었던 78세의 월드컵 최고령 감독인 네덜란드의 명장, 딕 아드보카트입니다.
최초로 진출한 퀴라소
그는 예선 도중 아픈 딸을 돌보러 잠시 팀을 떠났다가, 딸의 건강이 호전된 5월에 복귀해 이 기적을 완성했습니다. 재미있는 건 이 섬이 축구보다 야구가 강하다는 점입니다. MLB 스타 앤드루 존스의 고향이기도 하지요.
나머지 셋도 사연이 깊습니다. KOEI의 대항해시대 게임에 나온 적이 있지만, 멀쩡한 일반인이라면 거의 들어본 적도 없는 카보베르데(인구 약 52만)는 서아프리카 앞바다의 화산 군도로, 강호 카메룬을 제치고 아프리카 예선 조 1위로 올라왔습니다.
박지성의 맨유 시절 동료 나니의 출생지가 카보베르데
아시아의 요르단은 2023 아시안컵 준우승의 기세를 몰아 첫 본선행을 확정했고,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 최초의 월드컵 진출국으로, 2006년 이탈리아 우승 주장 출신 파비오 칸나바로가 지휘합니다.
그런데 데뷔국보다 더 가슴을 울리는 건 '복귀국'입니다. 아이티는 1974년 이후 무려 52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최빈국 수준의 경제에 대통령이 암살되고 갱단이 수도를 장악하고 갱단 폭력으로 일 년에만 5,000명 이상이 사망하는 극도의 정치적 불안과 위험 속에서 정상 훈련조차 어려운 나라가 제3국을 떠돌며 일군 기적입니다.
DR콩고 역시 1974년 '자이르'라는 옛 국호 시절 이후 52년 만의 귀환인데, 아프리카 플레이오프와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모두 뚫고 올라오며 바퀴벌레보다 강한 생명력을 자랑하며 드라마틱한 여정을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노르웨이가 있습니다. 이 나라는 유럽의 강호임에도 불구하고 운이 없어 1998년 이후 28년 만의 복귀를 이루었는데, 직전 출전이 에이스 엘링 홀란이 태어나기도 전이었습니다. 그 홀란이 예선에서 골을 쏟아부으며 팀을 끌고 왔지요. 28년 만의 가뭄 끝 귀환치고는, 등장부터 너무 화려합니다.
아무리 외국 동포 선수들 위주라고는 해도, 이런 나라가 출전하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다만 이 드라마들이 감동적으로 쓰인 것만은 아닙니다. 노르웨이나 DR콩고는 32개국 체제였어도 충분히 올라왔을 전력과 환경을 갖추었지만, 퀴라소는 26명 대표팀 중 25명이 네덜란드에서 태어났고, 16명이 네덜란드 유스 출신입니다. 또한 아이티 선수단은 26명 중 10명 정도만 아이티에서 태어났을 뿐, 나머지는 프랑스 등 해외에서 태어난 아이티계 선수들이 대다수이며, 그나마 아이티 자국 리그 소속 선수는 단 1명뿐입니다.
이처럼 데뷔국 상당수가 표면적으로야 감동적 스토리를 가지고 있지만, 그 이면은 실상 유럽 디아스포라 선수들로 채워졌고, '작은 나라의 기적'이라는 포장 아래에는, 분쟁이 넘쳐나는 지구촌과 매캐한 화약 냄새, 그리고 오히려 늘어나는 혐오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멈춘 ‘드멘’ 디디에 드록바처럼, 전쟁과 갈등을 끝낼 수는 없을지언정, 적어도 월드컵 기간만큼은 그들도 티비를 보며 자신의 팀을 목청껏 응원할 수 있는 잠깐의 평화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 이제 온 세계가 열광하는 잔치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그리고 시간이 흐르며 쌓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월드컵의 역사는 골만큼이나 사고로 가득합니다. 그것도 아주 골때리고 인간적인 사고들이지요. 월드컵에 얽힌 놀라운 이야기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첫 우승 트로피인 줄리메컵의 인생은 파란만장하다는 말로도 부족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1938년 우승국 이탈리아가 보관하던 이 트로피를 노린 것은 다름 아닌 나치였습니다. 이때 FIFA 부회장이자 이탈리아 축구협회장이던 ‘오토리노 바라시’라는 분이 결단을 내립니다. 은행 금고에 있던 트로피를 몰래 빼내, 자기 집 침대 밑 신발상자에 숨겨 전쟁 내내 끌어안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3제국의 군대가 유럽을 뒤지는 동안, 세계 축구의 영광은 구두 한 켤레 들어갈 상자 안에서 숨죽이고 있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값비싼 신발상자일 것입니다.
신발상자 시대가 끝나자 이번엔 도둑의 시대가 옵니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개막 넉 달 전, 런던의 우표 전시회에서 줄리메컵이 감쪽같이 사라집니다. 범인은 15만 파운드를 요구했지요. 그런데 이 트로피가 일주일 만에 극적으로 회수되었습니다. 찾아낸 영웅은 뜻밖에도 ‘개’였습니다. 도난 일주일 뒤, 런던 외곽을 산책하던 '피클스'라는 이름의 콜리 한 마리가 울타리 밑 신문지 뭉치를 킁킁대다 발견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스코틀랜드야드도 인터폴도 못 찾은 세계 최고의 트로피를 개가 찾았습니다. 견공 수사반장의 위엄이지요. 그리고 피클스의 업적 때문이었는지, 잉글랜드는 그 해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중간책 한 명만 붙잡았을 뿐, 진짜 도둑은 끝내 잡지 못했습니다. 진실은 52년이 지난 2018년에야 드러났는데, 런던 암흑가에서 '미스터 크래프티'라 불리던 시드니 쿠굴레레라는 인물이 동생 레그와 함께 훔친 것이었습니다. 돈 때문도 아니고, 그냥 너무 쉬워 보여서 "스릴로" 훔쳤다고 하지요. 그리고 그는 2005년 일흔아홉의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단 한 번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더 기가 막힌 건 그의 평생 자랑입니다. "내가 보비 무어보다 먼저 월드컵을 들어 올린 최초의 잉글랜드인"이라고 떠들고 다녔다는 것이지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 잉글랜드 주장이 웸블리에서 트로피를 드는 그해 여름보다 넉 달 먼저, 그는 웨스트민스터에서 그것을 재킷 안쪽에 숨겨 들어 올렸으니까요. 정작 형제는 트로피를 장인어른의 석탄 창고에 숨겨놓고는 "이걸 팔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닫고 돌려주기로 했다고 합니다. 세기의 도둑이 장물 처리에 실패해 자진 반납이라니, 도둑질에도 출구 전략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남긴 사건입니다.
트로피를 찾은 영웅견, 피클스의 최후는 좀 짠합니다. 이듬해인 1967년, 고양이를 쫓다가 목줄이 나뭇가지에 걸려 그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목줄은 지금도 맨체스터 국립축구박물관에 전시돼 있습니다. 나치도 못 가져간 트로피를 찾아낸 영웅이, 고양이 한 마리 때문에 무지개다리를 건너다니. 역시 고양이는 우주에서 가장 위험한 동물임에 분명합니다.
트로피를 찾은 영웅견, 피클스
집 나갔다 돌아온 줄리메 트로피 잔혹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브라질이 1970년 통산 세 번째 우승으로 줄리메컵을 영구 소유하게 됐는데, 1983년 리우의 협회 본부에서 또 도둑맞습니다. 이번엔 아무도 못 찾았습니다. 녹여서 금괴로 만들었다는 설이 유력하지요(다만 금 함량이 적어 금괴로 만들기 어려웠다는 반론도 있습니다).
압권은 그다음입니다. 맨체스터 국립축구박물관이 소장하던 한 트로피를 두고 "혹시 이게 사라진 진짜 원본이 아닐까" 하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X선 형광 분석으로 성분을 들여다봤더니, 은(silver)은 단 한 톨도 검출되지 않고 주석과 납만 잔뜩 나왔습니다. 진짜 은으로 만든 원본이 아니라 청동에 금칠한 복제품이었던 것이지요.
덕왕은 이 대목에서 세상 모든 것에 가르침이 있고 그것이 하나로 통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겉은 낭만과 환희로 빛나는데 실상 까보면 가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던 가짜 우승컵은, 오늘날 고성장을 표방하는 테마주의 화려함과 그 비어있는 실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화려할수록 경계해야 한다”는 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무겁게 받아들여야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축구는 가끔 사람을 너무 깊이 건드립니다. 1950년 7월 16일, 브라질 마라카낭 경기장에는 17만 명이 넘는 관중이 함성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무료입장까지 더하면 20만에 가까웠다는 설도 있지만, 검증 가능한 공식 수치는 이 17만 대입니다).
당시 무승부만 해도 우승이던 브라질이 우루과이에 1대 2로 역전패한 그 순간, 골키퍼 모아시르 바르보사는 "브라질 전체를 울린 남자"라는 평생의 낙인을 얻습니다. 이때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브라질은 이 패배 뒤 흰색 유니폼을 아예 버리고 지금의 노랑과 초록으로 갈아입습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때 홈에서 독일에게 7대 1로 개발렸었는데, 그때 유니폼을 다시 바꿨어야 하지 않았을까
TMI: 적이 그려준 노란색
그 상징적인 노랑 유니폼을 디자인한 사람이 당시 열아홉 살 청년이었는데, 알고 보니 국경 지대 출신의 우루과이 축구 팬이었습니다. 브라질을 상징하는 색을 브라질을 울린 우루과이 팬이 그렸다니, 축구의 신은 가끔 정말 짓궂습니다.
비극적인 이야기도 있습니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콜롬비아 수비수 안드레스 에스코바르는 미국전에서 공을 걷어내려다 자책골을 넣습니다. 콜롬비아는 탈락했고, 그는 닷새 뒤 고향 메데인의 나이트클럽 주차장에서 권총 여섯 발을 맞고 숨집니다. 범인은 콜롬비아에 거액을 걸었다가 잃은 도박꾼의 운전기사였다고 전해지지요. 자책골 하나가 사람의 목숨값이 된 것입니다. 돈이 걸리면, 공놀이는 더 이상 공놀이가 아니게 됩니다.
1969년에는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사이에 축구로 인해 '진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두 나라는 월드컵 본선 진출권을 두고 내리 3연전을 치렀습니다. 1차전 온두라스가 홈에서 승리하자, 한 엘살바도르 소녀가 권총으로 자살하는 비극이 발생했고, 2차전 엘살바도르가 홈에서 이기자, 온두라스 국기가 짓밟히고 불태워지는 모욕을 당했습니다. 멕시코에서 열린 최종전에서 엘살바도르가 연장 끝에 승리하자, 엘살바도르는 온두라스와의 국교 단절을 선언했고, 최종전으로부터 보름 뒤인 1969년 7월 14일, 엘살바도르 공군이 온두라스를 선제 공격하며 진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미주기구(OAS)의 중재로 약 4일 만에 휴전이 이루어졌으나, 약 100시간 동안 이어진 이 전쟁으로, 약 2,000 ~ 3,000명 사이의 사망하고 수십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습니다. 비극적인 것은 사망자의 대부분이 민간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건은 축구로 인해 발생한 어이없는 사건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곤 하는데 사실 이것이 오로지 축구 때문에 발생한 것은 아닙니다. 진짜 원인은 축구가 아니라 토지 개혁과 이민 문제였습니다. 당시 온두라스에 살던 엘살바도르인이 30만 명을 넘었고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는 오랜 기간 영토 분쟁을 겪고 있을 만큼 서로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습니다. 월드컵 예선 경기는 오랜 기간 쌓여왔던 양국의 정치적, 경제적 갈등 폭발에 불을 붙인 도화선이었을 뿐, 화약은 이미 쌓여 있었던 것이지요. 다행히 2006년 6월, 양국은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을 수용하며, 오랜 기간 분쟁 지역이었던 374.5km에 달하는 지상 국경선의 경계를 확정하면서 갈등을 풀었으며, 이후부터 지금까지 서로에게 국경을 개방하고 여권 검사 없이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드는 긴밀한 이웃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친한 이웃 나라가 된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세상 참 모를 일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히혼의 수치'라 불리는 담합 의혹전이 나옵니다. 서독이 1대 0으로만 이기면 두 팀이 나란히 진출하는 상황에서, 서독과 오스트리아는 전반에 한 골이 터진 뒤 사실상 공만 돌렸습니다. 데이터로 보면 더 노골적입니다. 후반에 두 팀이 합쳐 날린 슛이 단 2개, 후반 패스의 58퍼센트가 자기 진영 안에서만 오갔습니다(역대 평균은 41퍼센트입니다). 이 어이없는 경기 뒤 FIFA는 조별리그 최종전을 동시에 시작하도록 규칙을 바꿉니다. 규칙은 이렇게, 늘 사고가 난 뒤에 생깁니다.
머리가 무거워지셨을 테니, 잠시 월드컵의 진기명기들을 몰아서 구경하겠습니다.
먼저 시간 기록. 가장 빠른 골은 2002년 터키의 하칸 쉬퀴르가 우리 대한민국을 상대로 3-4위전에서 넣은 11초 골입니다. (당시 시작하자마자 어이없게 볼을 뺏긴 사람이 지금의 홍명보 감독입니다) 가장 빠른 퇴장은 1986년 우루과이 선수의 56초 퇴장입니다. 관중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골이 터지고, 1분도 안 돼 한 명이 쫓겨난 셈입니다.
기술 기록도 있습니다. 2022년 공인구에는 초당 500번 자기 위치를 보고하는 센서가 들어 있었습니다. 공 하나가 출근길의 우리보다 자기 위치를 잘 압니다. 이 '데이터 공' 이야기는, 글 후반부 머니볼 챕터에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라운드 안의 '전쟁'으로 악명 높은 경기, 일명 '뉘른베르크 전투'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2006년 6월 25일 16강 포르투갈 대 네덜란드전에서, 러시아 주심 발렌틴 이바노프가 무려 레드카드 4장에 옐로카드 16장, 합쳐 카드 20장을 꺼냈습니다. 이게 FIFA 주관 대회 사상 최다 기록입니다. 압권은 당시 바르셀로나 동료였던 데쿠(포르투갈)와 반 브롱크호스트(네덜란드)가 나란히 퇴장당해, 함께 벤치 옆에 앉아 남은 경기를 지켜본 ...

월드컵 첫 출전 카보베르데가 무적함대 스페인을 전반에 무실점으로 틀어막는걸 보며 소름 돋았습니다. 불혹의 나이에 저런 반사신경이라니ㄷ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