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체크리스트와 회독

시간통장 님의 글을 보니, 투자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의사결정 과정 하나하나를 꼼꼼히 따져보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 '나만의 투자 의사결정 과정을 명확한 체크리스트로 정리해서, 투자하기 전에 하나씩 점검해봐야겠다'고 막연히 생각해왔지만, 실천으로 옮기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글을 보고 더는 미루지 말고 구체적으로 정리해봐야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체크리스트에 어떤 항목들을 넣으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문득 생뚱맞게도 학창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학창 시절 모의고사는 전교 순위권에 들었지만, 정작 수능에서는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재수를 결심하고 고등학교 시절보다 모의고사 성적이 더 잘 나왔음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 대학에 진학해 CPA 시험을 준비하며 여러 합격 수기를 읽어보았습니다. 신기하게도 합격자들은 하나같이 '회독'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항상 새로운 문제집을 풀어대는 '양치기' 방식으로 수능을 공부했던 제게, '고시'라 불리는 시험들은 한 권을 반복해서 공부하는 것이 정석이라는 점이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 방법을 따라 열심히 회독에 매달렸습니다.
한 권의 책, 같은 문제를 적어도 5번, 많게는 10번에서 20번까지 반복하며 읽고 나니, 저는 제가 왜 수능에서 실패했는지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바로 공부를 '대충' 했던 것입니다. 어설프게 안다고 생각했던 개념들이 두 번, 세 번, 그리고 열 번을 반복해 보니 전혀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전까지의 제 지식은 완벽한 '이해'가 아니었던 셈입니다. 열 번쯤 읽고 나니 책의 구조가 머릿속에 그려지고, 문제 하나하나, 심지어 토씨 하나에서도 출제자의 의도가 느껴지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제 수준에서는 그 정도는 봐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이해'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CPA 시험을 공부한 이후로, 저는 무언가를 정확히 알고자 할 때는 '회독'이 최고의 방법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반복해서 읽는 것, 이보다 더 강력한 학습 도구는 없습니다. 책 역시 여러 권을 사기보다는, 몇 권의 좋은 책을 여러 번 깊이 있게 읽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투자 체크리스트를 만들려니 두루뭉술하게 떠오르는 것들은 많았지만, 명확한 원칙들은 좀처럼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제가 투자 의사결정 과정에서 무엇을 고려해야 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투자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가 아는 사람 중 가장 합리적으로 투자한다고 생각하는 분의 글을 '회독' 해보자고 결심했습니다. 바로 '월가아재'님의 시황 칼럼이었습니다.
과거의 글부터 최근 글까지 다시 정독하며, 실제 투자 의사결정 과정에서 어떤 것들을 고려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정리해봤습니다. 글들을 회독하는 과정에서, 최근 제가 했던 많은 고민의 해답이 이미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는 제가 예전에 글을 읽었을 때 그 내용을 충분히 소화하지 못했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렇게 정리한 지금 '모든 것을 완전히 이해했는가?'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아니오'일 것입니다. 지금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들도 다시 보면 또 다른 면이 보일 테니까요. 앞으로 시황 칼럼을 몇 번 더 회독하고, 아직 다 듣지 못한 교육 콘텐츠들도 시간 날 때마다 수강하다 보면, 언젠가는 모든 조각이 맞춰지며 온전히 이해하는 순간이 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때가 되면 비로소 저 스스로 완전한 투자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번 '회독'을 통해 정리한 내용 중 몇 가지를 공유해보겠습니다.
1. 리스크
1.1 불확실성은 얼마나 예측가능한가?
[2023 11 10]세상의 무작위성에 대하여
첫째, 투자 공부에 대한 노력을 하지 않는 자에게 세상은 그저 순수한 무작위성으로 보입니다. 그렇기에 본인이 건전한 지식을 쌓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정보를 습득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은 채로 투자한 것에서 큰 손실을 입게 되면, 마치 원시인들이 자연 재해가 신의 노여움이라 말하듯, 무언가 본인의 마음이 납득 가능한 설명을 찾기 위해 때로는 음모론적인 생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둘째, 투자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 세상의 무작위성은 설명 불가능한 무작위성, 설명 가능한 무작위성, 예측 가능한 무작위성으로 나뉩니다. 설명 불가능한 무작위성은 받아들이고, 설명 가능한 무작위성은 관리하고, 예측 가능한 무작위성에서는 수익을 내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셋째, 투자 공부를 하면 할수록, 설명 혹은 예측 가능한 무작위성은 늘어납니다. 펀더멘털 공부를 전혀 하지 않고 재무제표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 개별 종목들의 움직임은 설명 불가능한 무작위성입니다. 그러나 공부를 하는 사람은 종목 선택의 영역에서 설명 가능한 무작위성과 예측 가능한 무작위성을 조금씩 확보해 나갑니다.
넷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명하지 못하는 무작위성은 언제나 상존합니다. 본인의 공부를 통해 조금씩 설명 가능한 무작위성과 예측 가능한 무작위성의 영역을 넓혀 나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시장의 다음 움직임을 완전히 예측 가능하다는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입니다. 크게 레버리지를 일으키거나 많은 자금을 하나의 바구니에 담았다가 뼈저린 패배를 하게 됩니다.
현재의 불확실성은 내 능력 범위에서 예측 가능한 범위가 커야 한다.
내가 예측하지 못하는 불확실성은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내가 예측하지 못하는 불확실성이 없다고 판단된다면, 내 큰 착각으로 위험한 상태일 수 있다.
그 불확실성에 대한 내 예측이 알파(타인의 실수)를 가져갈 수 있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1.2 리스크 대비해서 높은 보상을 기대할 수 있는가? FOMO의 상황은 아닌가?
[2022.11.13] 왜 FOMO는 개인 투자자를 죽이는가?
매순한 내가 지는 리스크를 대비 했을 때 '높은 보상을 요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FOMO에 휩싸인 사람은 언제나 어떠한 불확실성에 대한 보상이 끝나거나, 오히려 오버슈팅한 지점에서 진입을 하게 됩니다. 주식 시장에는 언제나 여러 가지 불확실성이 연이어 존재합니다. 하나의 불확실성이 사라지면 그 뒤에 또 하나의 불확실성이 있고, 그 뒤에 또 하나의 불확실성이 기다립니다. 보통 폭등은 하나의 불확실성이 사라진 직후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그 불확실성이 존재할 때 진입했던 자들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지는 구간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모멘텀 때문에 어떤 큰 불확실성 직후에는 하락이든 상승이든 오버슈팅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말은, 위와 같이 불확실성 X, Y이 연달아 있는 상황에서, 불확실성 X가 사라지며 폭등장이 펼쳐졌을 때, 그 폭등이 어느 정도 진행된 시점에서 FOMO로 진입한 사람은 불확실성 Y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FOMO 로 진입하는 것은 현재의 수익이 나더라도 반복될 수록, 리스크 대비해서 낮은 보상을 받게 되므로 확정적으로 손실을 보게 된다.
불확실성을 가지고 투자하는 것은 투자의 본질이다. 다만, 그 불확실성 대비 기대이익이 큰 게임을 여러번 반복함으로 써 확률적인 이익을 기대해야한다.
1.3 리스크 관리를 우선적으로 생각하였는가?
시황칼럼 8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아플지라도, 이렇게 본인의 근거를 토대로 투자를 하는 것을 습관화하고, 미리 선제적으로 시나리오를 생각하는 것을 반복하는 과정에 점점 익숙해져 나갔을 때 획득하는 가시적인 효용은 수익률 측면보다는 리스크 관리 측면에서 옵니다. 솔직히 수익률만을 극대화하려면 무지성으로 핫해 보이는 종목 하나만 들고 있는 것이, 시장 전체가 상승장일 때는 가장 유효합니다. 그러나 투자자의 참된 실력은 단순한 수익률로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리스크 대비 수익률로 측정합니다. 그것을 측정하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직관적인 방법은 우리가 훈련과정에서도 배운 샤프지수입니다.
리스크 관리를 우선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투자 의사결정과정을 충실히 따랐는가의 의미.
수익률만 극대화 하려 하지 않고, 시나리오와 근거를 고려한 의사 결정 과정을 거쳐야 한다.
2. 근거기반 투자
2.1 명시적인 근거에 기반하였는가?
[2022 11 13]왜 FOMO는 개인 투자자를 죽이는가
제가 개인적으로 피터린치보다도 뛰어난 투자자라 생각하는 앤서니 볼턴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보유한 모든 주식에는 근거가 분명해야 한다"어제 오늘 매수한 주식에 대해, 1) 왜 그 종목을 매수했는지, 2) 왜 그 가격에 매수했는지, 3) 왜 그 시점에 매수했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는 사람은, 주체적인 투자 행위가 아니라 시장의 불확실성에 몸을 내맡기고 있다는 이야기일 겁니다.
명시적인 근거는 다음의 세가지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What) 왜 그 종목, 상품을 매수/매도 해야하는가?
(Price) 왜 이 가격에 매수/매도 해야하는가?
(Timing) 왜 이 시점에 매수/매도 해야하는가?
2.2 근거를 토대로 사후 검토를 하였는가?
[2024.05.25] Valley AI에서 공부한 이후, 과거의 무지성 투자가 두려워진 분들을 위해
이 시점에서는 두 가지가 중요한데요.
A. "근거에 기반해" 행동하는 것B. "근거를 토대로" 사후검토하는 것
먼저, 죽이되든 밥이되든, 어떤 의구심이 들든 간에 근거에 기반한 투자 의사결정을 일단 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건 절대로 '일단 아무 주식이나 매수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매수하는 판단이든, 매수하지 않고 관망하는 판단이든, 명시적인 근거에 기반해 결정을 내리시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생각들을 정리하고, 내가 모은 정보들과 생각하는 근거들을 정리한 뒤, 그것이 부족하다 느껴지든, 의구심이 들든 간에 일단 그 근거를 바탕으로 확률적 우위가 있는 방향으로 의사결정이라는 액션을 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액션을 취하고 나서, 그 판단에 대한 결과가 나오고 나면 사후 검토를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내 투자 의사결정에 대한 사후 검토를 할 때는 반드시 다음의 4가지 분류를 구분해야 합니다.• 가. 의사결정 시점의 근거와 판단이 합리적이었고, 그에 상응하는 좋은 결과가 나온 경우
• 나. 의사결정 시점의 근거와 판단이 합리적이었으나, 운나쁘게 예측불가능했던 변수로 나쁜 결과가 나온 경우
• 다. 의사결정 시점의 근거와 판단에 문제가 있었고, 그에 상응하는 나쁜 결과가 나온 경우
• 라. 의사결정 시점의 근거와 판단에 문제가 있었으나, 운좋게 예측불가능했던 변수로 좋은 결과가 나온 경우
투자를 실행에 옮기고 사후 검토를 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장기 누적 수익률은 높아진다.
일회성 결과가 아닌 투자 의사결정의 질을 높여나가야된다.
결과에 의존적이기 보다는 의사결정 시점의 근거와 판단이 합리적인지가 중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