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팬티다.
나는 캄보디아의 한 속옷 전문 공장에서 태어났다.
유칼립투스 나무 추출물인 리오셀로 만들어진 매끌매끌한 검은 원단 위로 꼼꼼한 박음질과 철저한 검수가 이어졌다. 모든 과정을 마치자 일본의 어느 유명 브랜드는 고무 밴드 위에 친환경 종이 띠를 둘렀다. 거기에는 '스트레치 복서'라는 멋진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렇게 리오셀에서 팬티가 되었다. 곧, 같은 공장에서 태어난 친구들과 함께 박스에 담겼고 우리는 바다 건너 영국으로 향했다.
런던 소호의 깔끔한 브랜드 매장.
세계적인 대도시의 잘나가는 동네에 자리 잡으니 나도 모르게 밴드가 팽팽해졌다. 밤이 되면 우리는 나란히 누워 쇼윈도 밖을 보며 각자의 미래를 그려보았다. 도시의 화려한 불빛은 우리에게 '어떤 주인을 만나게 될까?'라는 상상력을 자극했고 그 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날은 밝아 있었다.
이윽고 매장 문이 열리면 수많은 손길들이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나와 친구들의 부드러움을 손끝으로 확인한 사람들은 바로 우리의 진가를 알아보고는 친구들을 데려가기 시작했다.
먼저 떠나는 이들을 배웅하며, 같은 스트레치 복서로서 자부심을 느꼈지만 동시에 나만 홀로 남아 재고 상품이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으로 밴드가 처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한 손님이 나를 집어 들었다. 그는 나를 위해 기꺼이 £8.95라는 값을 치르고는 매장을 나섰다. 앞으로 이 사람을 그 누구보다 가까이서 섬길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나의 리오셀 원단이 파르르르 떨려왔다.
하지만 그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매장에서 너무나도 많은 물건을 사서 종이 가방이 가득 찼던 탓일까? 그는 불과 3분도 안 되어서 나를 길바닥에 떨어뜨려버리고 말았다.
종이 띠를 최대한 바스락거리며 가지 말라고, 나 여기 있다고 외쳤지만 그 외침은 소호를 가득 채운 인파와 자동차 소음에 맥없이 묻혀서 전해지지 못했다.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저 바라만 보는 것뿐이었다.
차가운 소호의 보도블록...
수많은 인파가 걸어 다니고 있었지만 다들 나를 피하기만 할 뿐 그 누구도 괜찮냐고 물어봐주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비구름이 하늘을 덮었다. 얇은 빗방울이 추적추적 종이 띠를 적시기 시작하더니 곧 내 원단까지 물기가 스며들어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제 이대로 쓰레기가 되는 건가라는 깊은 절망에 빠져있을 무렵, 왼쪽 다리를 살짝 절뚝이던 어떤 동양인 남성이 나를 집어 들었다.
"어, 이게 뭐지? 팬티네!"
"아니, 그걸 왜 주워?"
"포장도 안 뜯긴 완전 새 거야. 상표를 보니까 바로 저 앞 매장에서 산 사람이 떨어뜨렸나 봐."
그는 고개를 두리번두리번거리더니 나를 백팩 옆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우리 그렇게까지는 안 가난해..."
"버스 놓치겠다. 어서 가자."
유모차를 끌고 있던 여자가 면박을 줬지만 남자는...

헤아림꾼님... 브런치에서 작가 활동도 하시는군요. 참 글을 맛있게 쓰십니다.

그냥 취미생활 삼아 쓰고 있습니다 ㅋㅋ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팬티가 너무 귀여워요. 헤아림꾼님이랑 오래 행복하렴 팬티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행복하겠죠?

내가 산 팬티 어디갔더라...

그러게요 ㅋㅋㅋㅋㅋ 어디에 있을까요?

재밌네요. 글이 흡입력이 대단해요!

재밌게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런류의 글은 적정선을 타면서 흡입력있게 쓰기가 정말 어려운데 역시 브런치 작가는 다르군요

과찬의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