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이 육체를.
금방 주저앉을 듯 덜렁거리는 수족의,
화려한 꼭두각시, 불쌍한 장난감을.
머릿속은 거짓된 상상으로 가득 찬,
병들어 고통받는 존재를.
<법구경>
“네 엄마 아빠가 아니었으면 넌 태어나지 못했을 거니까.”
부모님에 대한 내 험담을 꾸짖는 그 간결한 논리를 두고,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무언가 결함이 있는 듯 했다. 마치 내가 시체 부위를 짜 맞춘 다음 생명력을 불어넣은 프랑케슈타인의 괴물인 양, 내게 생명을 준 직계 존속의 공로를 인정해야만 하나?
슬기롭게도 나는 작가 지망생 시절 썼던 습작을 거의 대부분 파기했다.
라도슬라브 A. 차노프는 뭇 존재들에 대해 혹독한 평가를 내리는 자신의 저서 <악의 본성>에서, 독일 철학자 율리우스 반젠이 열일곱 살이던 1847년에 쓴 단상 한 구절을 인용한다. “인간은 자의식을 지닌 무다.” 이 구절이 유치하다고 생각하든 조숙하다고 생각하든 상관없이, 이런 생각은 우리 인간이라는 종과 그 종의 열망에 대해 냉소하는 아주 오래된 전통에 속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무모함에 대한 지배적인 감정은 보통 조건부 승인과 허풍 섞인 오만함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다. 대체로 청중을 모으려 하거나 더 나아가 사회적 지위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이런 표어로부터 이득을 보게 마련이다.
인류에 대해 도저히 긍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면, 애매하게 말하는 게 낫다.
형이상학에 손을 댄 많은 사람처럼, 반젠은 모든 실재가 겉보기와 달리 통일되고 불변하는 힘의 표현으로, 다양한 철학자가 다양한 방식으로 특징짓는 우주적 운동이라 선언했다.
그가 생각하는 우주는 계획이나 방향성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태초부터 그 우주는 어떤 각본도 연기자도 없이 맹목적인 자기 훼손이라는 주동력으로 돌아가는 연극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철학에서, 모든 것은 어지러운 학살의 환상곡에 휩쓸리 게 된다. 모든 것이 서로를 갈기갈기 찢는다, 영원히. 하지만 휩쓸려 들어간 거의 모든 존재는 공허 속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요란을 감지하지 못한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어떤 생물도 자신이 대학살의 축제에 휘말렸다는 것을 감지하지 못한다. 오직 그가 말한 ‘자의식을 지닌 무’만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고, 혼돈의 향연 속에서 전율을 느낄 수 있다.
좋든 나쁘든 간에, 타협 없는 비관론은 대중에게 호소하기 어렵다.
당신은 이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