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안을 역사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을 대응으로, 논쟁으로 파악함을 뜻한다.
청취자는 오락을 원한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라디오방송이 제공할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교훈적 구성의 무미건조함과 그 전문가적 편협성에 ‘난잡한’ 구성의 수준 미달과 그 빈약함만이 호응했다.
오페라 관객, 소설 독자, 유람객, 이와 유사한 유형 등에서 나타나는 소비 성향의 무한한 형성과 더불어 둔감하고 표현이 없는 대중, 곧 자신의 판단에 대한 척도도, 자신의 느낌에 대한 언어도 없는, 그야말로 좁은 의미에서의 공중이 창출되었다.
연극과 라디오 - 이 두 제도를 편견 없이 고찰하는 경우,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바는 조화의 감정은 아닐 것이다. 이 둘 사이의 경쟁 관계는 라디오와 콘서트홀 사이 관계만큼 그리 첨예하지는 않다. 그러나 애초부터 이 양자 사이에 공동 작업이 진척될 수 있기에는 한편으로는 라디오의 활동이 갈수록 더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을, 다른 한편으로는 연극의 곤궁함이 갈수록 비대해진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라디오는 연극에 비해 더 새로운 기술뿐 아니라 동시에 더 노출되는 기술을 재현한다. 라디오는 아직 연극처럼 고전 시기를 겪지 않았다. 라디오가 장악하고 있는 대중의 규모는 훨씬 더 크며, 무엇보다도 기계장치의 근거인 물질적 요소들과 공연물의 근거인 정신적 요소들이 청취자의 관심사에 맞게끔 서로 아주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는 점이 결정적이다. 그렇다면, 이에 비해 연극이 다른 저울판에 올려놓을 만한 것은 무엇일까? 살아 있는 수단의 투입 – 이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라디오방송이 열어놓은 기술적 가능성, 곧 같은 시간에 무한한 대중을 상대하는 힘으로 대중화는 선의의 인간 친화적 의도를 지닌 성격을 뛰어넘어 번창했고, 현대 광고기술은 이전 세기의 시도들과 차별성을 보이는 것 못지않게 자기만의 종형 법칙들로 옛 숙련방식과 뚜렷한 대조를 보이는 것을 과업으로 삼았다.
통속성과 대중성은 좀 더 확실히 구분해야 하나 이를 간단히 말하자면 통속성이란 예술적 교양이 없는 일반 속중에게 저렴한 관심과 감격을 주는 요소를 담은 것이며 대중성이란 이러한 속중이 아닌 계급으로서의 일반 사회계층의 의욕 및 호의를 목표로 하여 인간으로서 소박하고 건전한 감성에 이를 수 있는 단순 양명한 예술적 요소를 주로 삼는다고 해두겠다. 하지만 대중적으로 만들려다 통속성에 빠지는 것처럼, 통속적이기에 이따금 빠지는 비참함이란 그게 대중적이지 못하단 점이며 동시에 진정한 보편성을 잃는다는 데 있다.
몇 달간의 지원 후에, 나는 한 방송국으로부터 내 전문 분야를 주제로 20분간 청중과 환담을 나누어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내 담소가 공감을 얻어낼 경우를 생각해, 그들은 이번과 같은 보도의 정례화도 약속했다.
초보자는 다소 대규모의 청중 앞에서 말하고 있다고 믿는 우를 범합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전도된 생각은 없습니다. 라디오 청취자는 거의 항상 개별자이고, 당신은 수천 명을 상대한다고 가정해도 늘 수천 명의 개별자와 연결될 뿐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늘 마치 한 사람에게 –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다수의 개별자에게 말을 거는 듯 한 태도를 취해야지 결코 다수의 군집자를 대하는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학문적으로 가능한 한 폭넓은 독차층에 다가가려면 지식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 가장 훌륭한 교훈을 준 것이 현대물리학을 대중화한 위대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독자를 놀이와 융합했고, 또 독자에게 앞서 나아가고 있다는 감각을 주었다. 이러한 확신은 단연코 소재에 집착할 필요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