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먼 자들의 국가>

<눈 먼 자들의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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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기계
2024.08.21조회수 1회

외국 언론에서 조난자의 수온별 생존시간을 따져보는 사이 한국에서는 사망 시 보험금을 계산했다. 사람들은 권력이 생명을 숫자로 다루는 방식에 분개했다.


이름을 들었다. 학생, 실종자, 희생자, 승객이라 불릴 때와 달리, 그들의 가족이 늘 불렀던 방식으로, 본명으로, 별명으로 불리는 걸 들었다. 가족들로서는 살면서 만 번도 더 불러본 이름이었을 거다. 그 이름에 담긴 한 사람의 역사가, 시간이, 그 누구도 요약할 수 없는 개별적인 세계가 어둠 속에서 밤마다 쩌렁쩌렁 울렸다.


그 소식을 들을 때마다 길을 가다, 밥을 먹다, 청소를 하다, 아랫배를 얻어맞은 듯 허리가 꺾였다. 몸 안에 천천히 차오르는 슬픔이 아니라 습격하듯 찾아오는 통증이었다.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사후에 들은 게 아니다. 배 안에 있는 이들과 동 시간을 보낸 거다. 지난 4월 세월호가 가라앉는 걸 전 국민이 봤다. 들은 게 아니라, 읽은 게 아니라, 앉아서, 서서, 실시간을 봤다. 매일매일, 천천히, 고통스럽게 봤다. 아침 뉴스로도 보고, 저녁 뉴스로도 보고, 인터넷 뉴스로도 봤다. 그러니까 ‘한 명’도 구하지 못하는 걸, 관계자들이 책임을 가르고 이득을 따지는 동안 일부 솟아 있던 선체마저 바다 속으로 완전히 잠기는 걸 봤다.


‘최선’을 다하겠단 얘길 들었다. ‘최대’한 힘쓰겠다는 말도, ‘모든 걸 동원’하겠다는 약속도 들었다.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반복해 들었다. 그 안에는 부사와 형용사, 서술어와 추상명사가 많았지만, 시제와 동사, 주어와 고유명사는 잘 보이지 않았다. 곧이어 ‘책임’이란 말이 들려왔다. ‘적폐’라는 말과, ‘엄벌’이라는 말도 등장했다. 그런데 그 말을 끝까지 다 들어도 대체 누가 무엇을 어떻게 책임지겠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전봇대에 붙은 ‘세계 속의 안산, 행복한 사람들’이란 슬로건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 같았으면 관대하고 무심하게 지나쳤을 건전한 말들이었다. 한때 크고 좋은 말들을 가져다 아무 때고 헤프게 쓰는 정치인들을 보며 ‘언어약탈자’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안산에서 이제는 말 몇 개가 아닌 문법 자체가 파괴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낱말이 가리키는 대상과 그 뜻이 일치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걸, 기의와 기표의 약속이 무참히 깨지는 걸 보았다.


앞으로 바다를 볼 때 이제 우리 눈에는 바다 외에 다른 것도 담길 것이다. ‘가만히 있어라’라는 말 속엔 영원히 그늘이 질 거다. 특정 단어를 쓸 때마다 그 말 아래 깔리는 어둠을 의식하게 될 거다. 어떤 이는 노트에 세월이라는 단어를 쓰려다 말고 시간이나 인생이란 낱말로 바꿀 것이다. 당분간 ‘침몰’과 ‘익사’는 은유나 상징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본 것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지난 한 달간 많은 걸 보고 들었다. 보지 않으면 놓칠 것 같았고, 놓치고 나면 속을 것 같았다. 되도록 모든 걸 보고, 누가 어떤 식으로 말하고 있는지 기억해두려 했다.


환멸 안에 감추려 해도, 냄새처럼 기어코 드러나고야 마는, 우리가 살아있다는 사실의 그 어쩔 수 없는 선명함이었다.


사과 한 알이 쪼개졌습니다.

사과 내면의 씨앗이 보입니다.

쪼개져야 보이는 것이라면, 그것은 폭력적인 것입니다.

씨앗이 죽은 사람의 홉뜬 눈동자처럼 보입니다.


나치 체제가 아직 자리 잡지도 않았고, 전체주의적 공산주의에 대한 정보도 없었던 시절에 쓰인 카프카의 작품들은 이후 역사에 전면적으로 등장하는 전체주의적 상황에 시달리는 개인의 절망적 현실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문학은 당대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니까 카프카가 죽은 뒤 등장한 후대의 작가들은 자신들이 처한 이런 현실을 작품 속에 담았을 뿐임에도, 그 작품들은 카프카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후대 작가들로서는 이거 좀 난처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현실에 소유권이 있다면, 그런 현실이 찾아오기 전에 죽은 카프카가 아니라 자신들일 테니까. 그러므로 카프카는 후대 작가들의 오리지널리티를 표절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바야르의 주장이다. 기발하게 도치시켜 표현해서 그렇지, 자신의 시대를 뛰어넘는 작가, 혹은 죽은 뒤에 인정받는 작가라는 개념은 그렇게 낯설지 않다. 그래서 바야르 식으로 말하자면, 문학사에 남을 만한 작품들은 예외 없이 후대의 작품을 예상 표절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글쓰기가 그토록 절망적인 까닭은 지금으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미래의 것에도 영향받기 때문이다. 즉 “창작이 단지 과거의 유령들과 더불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유령들과도, 다시 말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작가들과도 똑같이,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더불어 이루어진다.”


가라타니 고진은 <역사와 반복>에서 정치와 경제의 차원에서 벌어지는 역사적 반복 혹은 순환에 대해서 썼는데, 물론 피에르 바야르 같은 기발함을 기대할 순 없다. 가라타니 고진은 마르크스가 뒤에 나올 프로이트의 <꿈이 해석>을 선취했다며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브뤼메르 18일>에 기초하여 생각한다면, 우리는 특별히 정신분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서 마르크스는 거의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선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단기간에 일어난 ‘꿈’과 같은 사태를 분석하고 있다.”


바야르가 ‘카프카의 직관’이라고 부른 것을 가라타니 고진은 ‘오에 겐자부로의 예견’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1960년을 배경으로 하는 오에의 소설 <만엔원년의 풋볼>에 나오는 정치행동은 이 작품이 출간된 후인 1960년대 말의 학생운동을 묘사했다고 보는 편이 더 좋다. 예를 들어 소설 속에서 다카시는 “게다가 그들은 이것에 참가함으로써 100년을 뛰어넘어 만엔원년의 봉기를 추체험하는 흥분을 느끼고 있어, 이것은 상상력의 폭동이야.”


인간은 저절로 나아질 수 없고, 그런 인간의 역사 역시 시간이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진보하지 않는다. 가만히 놔두면 인간은 나빠지며, 역사는 더 나쁘게 과거를 반복한다. 즉 진보의 관점에서 보자면, 과거가 더 낫게 미래를 반복한다. 그러므로 이반 일리치는 “미래는 삶을 잡아먹는 우상입니다.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오직 희망만이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저절로 진보하는 게 역사였다면, 지금쯤은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졌을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지금 읽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역병이 창궐하는 테바이는 2014년 4월 진도체육관과 팽목항의 풍경을 묘사하는 듯하다.


헤아릴 수 없는 죽음으로 도시는 죽어가고,

이 도시의 자식들은 동정도 문상도 받지 못한 채

땅바닥에 누워 죽음을 퍼뜨리고 있구나.

거기에 맞춰 아내들과 백발의 노모들은

여기저기서 제단으로 몰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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