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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천재> (1) - 아이히만, 스탈린, 루소, 푸코, 비트겐슈타인, 카프카
은둔지Memo

<광기와 천재> (1) - 아이히만, 스탈린, 루소, 푸코, 비트겐슈타인, 카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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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기계
2024.08.21조회수 4회

아이히만은 반성할 줄 모르고 성찰할 줄 모르는 인간, 요컨대 사유할 줄 모르는 인간이었다.


유대인 절멸 계획을 사무적으로 실행하는 아이히만 안에 자제력을 잃고 유대인 뺨을 때린 일을 책망하는 또 다른 아이히만이 있다. 이 희비극적인 사건은 ‘악의 평범성’ 밑에 잠복해 있는 ‘삶의 모순성’을 들여다보게 해준다. 아이히만의 악은 뿌리도 깊이도 없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악이었지만, 동시에 그 악을 산출한 아이히만의 마음은 ‘평범성’이라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기이하고도 그로테스크한 역설을 품고 있었다.


높이 자라든 깊이 자라든 정신의 크기가 클수록 문제의 크기도 커진다. 벌레 한 마리 죽이지 못할 것 같은 사람의 내면에서 사납고 무서운 원한이 쇠꼬챙이처럼 벌겋게 달아오른다. 모순투성이 인간은 도화지 같은 마음에 떨어진 작은 얼룩을 지우지 못해 어두운 동굴과도 같은 상상력의 극한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 자신을 탄핵하고 자신을 처벌한다.


부하린은 스탈린의 별장을 아무 때나 찾아갔고 스탈린 가족들과 허물없이 지냈다. 혁명 동지 가운데 부하린만큼 스탈린과 친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 부하린이 공포정치의 희생자가 됐다. 1937년 트로츠키파로 몰려 재판에 회부된 부하린은 자신에게 죽음밖에 남은 것이 없음을 깨닫고 감옥 안에서 마지막으로 이 짧은 편지를 써 스탈린에게 보냈다. 그것은 왜 그런 운명이 닥쳐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자가 속삭이듯 내지르는 단말마였다.

  • 코바(스탈린), 왜 당신한테 내 죽음이 필요하지?

힘들었던 시절 스탈린을 돌봐줬던 처가 쪽 사람들도 대다수 죽거나 수용소로 끌려갔다. 아내는 자살했다. 마치 자신에게 인간성이 있다는 사실을 지워 없애려는 듯, 스탈린은 자신의 인간적 체취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스탈린은 자기가 만든 운명에 갇힌 사람이었다. 그는 한 세계를 얼어붙게 했으나 세계와 행복하게 만나지 못했다.


밀란 쿤데라는 두 종류의 바람둥이를 이야기한다. 한쪽의 바람둥이는 ‘낭만적 집착형’이다. 그들은 “모든 여자에게서 자신의 고유한 꿈, 여자에 대한 자신의 주관적인 개념을 찾는다.” “그들이 여자에게서 찾는 것은 그들 자신, 그들의 이상이다.” 다른 한 종류의 바람둥이는 이 소설의 주인공 토마스와 같은 유형이다. 토마스에게 여자의 의미는 ‘여자와 여자 사이’에 있다. 나비가 꽃과 꽃 사이를 날아다니며 꿀을 빨 듯, 토마스는 이 여자와 저 여자 사이의 미세한 차이에 탐닉한다. 한 여자가 지닌 ‘다름’을 만끽하고 나면 곧바로 다른 여자에게로 날아간다.


그들을 몰아가는 것은 어떻게든 ‘색다름’을 찾겠다는 욕망이다. 끝없는 차이의 물결 위를 그들은 질주하듯 스치고 지나간다. “바람둥이 호색한은 여자를 사냥하면서 점차 관습적인 여성미를 멀리하고, 십중팔구 기이한 것을 수집하는 수집가가 된다.”


이 글이 소개하는 인간은 대푯값을 지녔다고 판단되는 인간이다.


한계상황에서 자신을 한계 너머로 밀어붙이려 했던 사람들, 불행한 의식을 견딜 수 없어 끝 모를 모험에 뛰어들었던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속성이 광기이고 천재였을 뿐이다. 천재는 광기의 심연에서 솟아오르며, 광기는 천재의 어두운 그림자와 같다. 광기가 없었다면 천재성도 없었을 것이며, 천재가 아니었다면 광기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 것이다.


루소의 일생은 화해할 길 없는 모순의 드라마였다. 그러나 그 모순, 그 불화의 틈새에서 독창성으로 빛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이 불완전한 인간이야말로 인류사의 진정한 정신의 도약이 불완전성의 산물임을, 불완전한 인간의 커다란 내적 모순의 산물임을 증거하고 있다.


출구 없는 시대의 자궁 안에서 그는 자기 자신과 가망 없는 사투를 벌였다.


모든 것이 모순이었다. 그는 역사상 가장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자기에게 집착했지만, 꼭 그만큼의 정도로 자신을 혐오했다.


<에밀>은 근대 교육학의 출발점이었다. 최초로 어린이를 발견한 저작이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작품의 저자는 현실에선 자기가 낳은 아이들을 남김없이 고아원에 버린 비정한 남자였다. 그는 상상력 안에서만 어린이를 사랑할 수 있었다


인류 사상 최초로 한 조각의 땅에 울타리를 치고 “이 땅은 내 것이다”라고 말할 생각이 든 사람이 바로 문명사회를 처음 세운 사람이다. 만약 누군가가 나서서 말뚝을 뽑아버리고 이웃들에게 “땅의 산물은 모든 사람의 것이지만 땅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으면 파멸할 것이다”라고 외쳤더라면 인류는 그 많은 전쟁과 살육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볼테르는 이 부분을 읽으며 책의 여백에 “이것은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약탈당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거지의 철학이다”라고 썼다. 제네바 근처에 커다란 영지를 구입한 볼테르에게 루소의 주장은 확실히 위협적이었을 것이다. 볼테르는 또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두고, “읽다 보면 네 발로 기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책”이라고 비꼬았다.


귀족이 하인이 되고, 부자가 빈자가 되며, 군주가 신하가 된다. 그런 운명적인 사건은 너무나 희귀해서, 당신을 그런 사건에 말려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위기 상황과 변혁의 시대에 접근하고 있다.


<관용론>으로 종교적 불관용을 고발했던 볼테르는 자신의 적수에게 관용을 베풀 생각이 없었다. “나와 견해가 다르더라도 그 견해가 억압받는다면 그 억압받는 자와 함께 싸울 것이다”라고 공언했던 이 관용의 사도는 루소에 대해서만큼은 자신의 공언을 식언으로 만들었다.


볼테르는 파리와 그 도시의 유쾌함과 사치의 아들이었다. 반면 루소는 제네바의 아들이었고, 자신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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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상 입문>

현대사상을 배우면 복잡한 것을 단순화하지 않고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아니, 복잡한 것을 단순화하는 게 지성 아닌가?”라며 딴지를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단순화하면 망가지는 리얼리티가 있고 그것을 존중해야한다라는 가치관 혹은 윤리를 제시하고 싶습니다. 현대에는 “제대로 하는” 방향으로 여러 개혁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똑바로 해야 한다. 제대로 해야 한다.” 즉, 질서화입니다. 일탈을 단속해서 사회가 규칙대로 산뜻하게 움직이게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기업에서는 컴플라이언스를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기업에서뿐만 아니라 개인의 생활에서도 우리는 넓은 의미의 컴플라이언스(준수) 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할까, 뭔가 불평을 듣지 않으려고 움찔하는 삶의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라며 논의의 필요성 자체가 없다고 묵살해버리며 이야기를 들어 주지도 않습니다.   시대의 큰 경향만 말해 둡니다. 현대는 더욱더 질서화, 청정화로 향하고 있으며, 어떤 문제가 발생해 재발 방지책을 세울 경우, 그 문제의 예외성이나 복잡성은 무시되고 천편일률적으로 규제만 늘리는 방향으로 향하기 일쑤입니다. 그게 단순화인 거죠. 세계의 미세한 요철이 불도저로 고르게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일을 제대로 하려는 의지는 개별 주체적인 것에서 눈을 떼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사상입니다. 현대사상은 질서를 강화하는 움직임에 대한 경계심을 갖고 질서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 즉 ‘차이’에 주목합니다. 20세기 사상의 특징은 배제되어 온 불필요한 것을 창조적인 것으로 긍정했다는 것입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니체의 철학에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표현된 거칠게 휘몰아치는 일탈의 에너지를 창조적인 것으로 긍정했습니다. 일탈에 창조적인 것이 깃들어 있다는 사고방식은 20세기 전체를 통해 대중화되었습니다. 가끔 제멋대로 뻗어 나가고 증식하는 식물에 눈을 돌리면, 사물을 말로 옭아매려는 경향에 구멍을 낼 수 있습니다.   LGBTQ의 권리에 관해 결정적인 작업을 한 ‘주디스 버틀러’는 인간의 욕망에 이성애가 반드시 기본이 아니라는 점을 독특한 논법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근대란 시민사회와 진보주의, 과학주의 등이 결합물. 근대는 민주화가 진행되고 기계화가 진행되면서 오래된 습관을 버리고 더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되어 “인간은 진보해가는구나”라고 모두가 믿는 시대입니다. 리오타르 “공통의 이상이 상실되고 포스트모던에 이르러서는 ‘거대 서사’가 없어졌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시기에는 거짓말을 사실인 것처럼 밀어붙이는 것을 “post truth"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한 혼란의 원인이 과거의 포스트모던적 상대주의에 있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나왔다. 이전 시대에는 위대한 문학작품에 같은 구조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권위주의에 도전하는 대담한 태도였다. 패턴의 변화나 패턴에서 벗어나는 것, 일탈을 문제 삼고 역동적으로 변화해 가는 세계를 논하고자 한 것이 포스트 구조주의다. 회색 지대야말로 인생의 리얼리티가 있다. 싫은 것 같기도 하고, 바로 그것에 즐거움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양가성이 중요하다. 반드시 능동적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수동적이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두 개념이 서로를 밀치고 뒤엉키면서 전개되는 회색 지대가 있고, 바로 거기에 삶의 리얼리티가 있다. 이항대립의 탈구축: 두 개념의 대립에 초점을 맞춰 파악하여 좋고 나쁨을 말하려는 자세를 일단 유보한다. 오에 겐자부로 같은 버릇이 강한 작가의 책을 읽는 듯한 마음으로 씨름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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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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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먼 자들의 국가>

외국 언론에서 조난자의 수온별 생존시간을 따져보는 사이 한국에서는 사망 시 보험금을 계산했다. 사람들은 권력이 생명을 숫자로 다루는 방식에 분개했다. 이름을 들었다. 학생, 실종자, 희생자, 승객이라 불릴 때와 달리, 그들의 가족이 늘 불렀던 방식으로, 본명으로, 별명으로 불리는 걸 들었다. 가족들로서는 살면서 만 번도 더 불러본 이름이었을 거다. 그 이름에 담긴 한 사람의 역사가, 시간이, 그 누구도 요약할 수 없는 개별적인 세계가 어둠 속에서 밤마다 쩌렁쩌렁 울렸다. 그 소식을 들을 때마다 길을 가다, 밥을 먹다, 청소를 하다, 아랫배를 얻어맞은 듯 허리가 꺾였다. 몸 안에 천천히 차오르는 슬픔이 아니라 습격하듯 찾아오는 통증이었다.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사후에 들은 게 아니다. 배 안에 있는 이들과 동 시간을 보낸 거다. 지난 4월 세월호가 가라앉는 걸 전 국민이 봤다. 들은 게 아니라, 읽은 게 아니라, 앉아서, 서서, 실시간을 봤다. 매일매일, 천천히, 고통스럽게 봤다. 아침 뉴스로도 보고, 저녁 뉴스로도 보고, 인터넷 뉴스로도 봤다. 그러니까 ‘한 명’도 구하지 못하는 걸, 관계자들이 책임을 가르고 이득을 따지는 동안 일부 솟아 있던 선체마저 바다 속으로 완전히 잠기는 걸 봤다. ‘최선’을 다하겠단 얘길 들었다. ‘최대’한 힘쓰겠다는 말도, ‘모든 걸 동원’하겠다는 약속도 들었다.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반복해 들었다. 그 안에는 부사와 형용사, 서술어와 추상명사가 많았지만, 시제와 동사, 주어와 고유명사는 잘 보이지 않았다. 곧이어 ‘책임’이란 말이 들려왔다. ‘적폐’라는 말과, ‘엄벌’이라는 말도 등장했다. 그런데 그 말을 끝까지 다 들어도 대체 누가 무엇을 어떻게 책임지겠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전봇대에 붙은 ‘세계 속의 안산, 행복한 사람들’이란 슬로건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 같았으면 관대하고 무심하게 지나쳤을 건전한 말들이었다. 한때 크고 좋은 말들을 가져다 아무 때고 헤프게 쓰는 정치인들을 보며 ‘언어약탈자’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안산에서 이제는 말 몇 개가 아닌 문법 자체가 파괴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낱말이 가리키는 대상과 그 뜻이 일치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걸, 기의와 기표의 약속이 무참히 깨지는 걸 보았다. 앞으로 바다를 볼 때 이제 우리 눈에는 바다 외에 다른 것도 담길 것이다. ‘가만히 있어라’라는 말 속엔 영원히 그늘이 질 거다. 특정 단어를 쓸 때마다 그 말 아래 깔리는 어둠을 의식하게 될 거다. 어떤 이는 노트에 세월이라는 단어를 쓰려다 말고 시간이나 인생이란 낱말로 바꿀 것이다. 당분간 ‘침몰’과 ‘익사’는 은유나 상징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본 것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지난 한 달간 많은 걸 보고 들었다. 보지 않으면 놓칠 것 같았고, 놓치고 나면 속을 것 같았다. 되도록 모든 걸 보고, 누가 어떤 식으로 말하고 있는지 기억해두려 했다. 환멸 안에 감추려 해도, 냄새처럼 기어코 드러나고야 마는, 우리가 살아있다는 사실의 그 어쩔 수 없는 선명함이었다. 사과 한 알이 쪼개졌습니다. 사과 내면의 씨앗이 보입니다. 쪼개져야 보이는 것이라면, 그것은 폭력적인 것입니다. 씨앗이 죽은 사람의 홉뜬 눈동자처럼 보입니다. 나치 체제가 아직 자리 잡지도 않았고, 전체주의적 공산주의에 대한 정보도 없었던 시절에 쓰인 카프카의 작품들은 이후 역사에 전면적으로 등장하는 전체주의적 상황에 시달리는 개인의 절망적 현실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문학은 당대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니까 카프카가 죽은 뒤 등장한 후대의 작가들은 자신들이 처한 이런 현실을 작품 속에 담았을 뿐임에도, 그 작품들은 카프카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후대 작가들로서는 이거 좀 난처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현실에 소유권이 있다면, 그런 현실이 찾아오기 전에 죽은 카프카가 아니라 자신들일 테니까. 그러므로 카프카는 후대 작가들의 오리지널리티를 표절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바야르의 주장이다. 기발하게 도치시켜 표현해서 그렇지, 자신의 시대를 뛰어넘는 작가, 혹은 죽은 뒤에 인정받는 작가라는 개념은 그렇게 낯설지 않다. 그래서 바야르 식으로 말하자면, 문학사에 남을 만한 작품들은 예외 없이 후대의 작품을 예상 표절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글쓰기가 그토록 절망적인 까닭은 지금으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미래의 것에도 영향받기 때문이다. 즉 “창작이 단지 과거의 유령들과 더불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유령들과도, 다시 말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작가들과도 똑같이,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더불어 이루어진다.” 가라타니 고진은 <역사와 반복>에서 정치와 경제의 차원에서 벌어지는 역사적 반복 혹은 순환에 대해서 썼는데, 물론 피에르 바야르 같은 기발함을 기대할 순 없다. 가라타니 고진은 마르크스가 뒤에 나올 프로이트의 <꿈이 해석>을 선취했다며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브뤼메르 18일>에 기초하여 생각한다면, 우리는 특별히 정신분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서 마르크스는 거의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선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단기간에 일어난 ‘꿈’과 같은 사태를 분석하고 있다.” 바야르가 ‘카프카의 직관’이라고 부른 것을 가라타니 고진은 ‘오에 겐자부로의 예견’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1960년을 배경으로 하는 오에의 소설 <만엔원년의 풋볼>에 나오는 정치행동은 이 작품이 출간된 후인 1960년대 말의 학생운동을 묘사했다고 보는 편이 더 좋다. 예를 들어 소설 속에서 다카시는 “게다가 그들은 이것에 참가함으로써 100년을 뛰어넘어 만엔원년의 봉기를 추체험하는 흥분을 느끼고 있어, 이것은 상상력의 폭동이야.” 인간은 저절로 나아질 수 없고, 그런 인간의 역사 역시 시간이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진보하지 않는다. 가만히 놔두면 인간은 나빠지며, 역사는 더 나쁘게 과거를 반복한다. 즉 진보의 관점에서 보자면, 과거가 더 낫게 미래를 반복한다. 그러므로 이반 일리치는 “미래는 삶을 잡아먹는 우상입니다.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오직 희망만이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저절로 진보하는 게 역사였다면, 지금쯤은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졌을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지금 읽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역병이 창궐하는 테바이는 2014년 4월 진도체육관과 팽목항의 풍경을 묘사하는 듯하다. 헤아릴 수 없는 죽음으로 도시는 죽어가고, 이 도시의 자식들은 동정도 문상도 받지 ...

<어슐러 르귄의 말>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인터뷰어는 출판사 홍보팀에서 책에 관해 쓴 보도 자료를 읽고 오는 사람들이다. 편리한 문장 발췌까지 갖춰서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그 발췌 문장을 크게 읽고 나서 진지한 목소리로 말한다. “자, 여기에서 하신 말씀에 대해 더 이야기해주시죠.” 그와 만나본 뒤 ‘좋은 인터뷰’에 대한 기준이 영영 고정되었다. 좋은 인터뷰는 하고 있는 말에 대해 전부터 생각해보았고, 말하고 있는 지금도 상대방이 하는 말에 비추어 생각해보고 있는 사람들끼리 나누는 대화다. 이제 나는 질문 한두 개만 받아보아도 불만만 남을지, 노력에 보상받을지 안다. 좋은 인터뷰란 멋진 배드민턴 랠리와 비슷하다. 그는 조금 굳어 있었고, 낯을 가렸지만, 곧 대화에 빠져 들었고, 나는 우리의 셔틀콕이 날고 있음을 알았다. 상상이란 남는 시간에만 하는 무의미한 활동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에게 만드는 권능이다. “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용에게 잡아먹힐 때가 많지요. 속에서부터요” 어려서부터 르 귄의 상상력이라는 날개를 타고 날아본 나로서는 진짜 어슐러 르 귄을 만나면 어떨지 궁금했다. 몸 안에서 글이 울리면, 스스로가 쓰는 글을 들으면 올바른 리듬을 들을 수 있고, 그러면 문장이 깔끔하게 이어지는 데 도움이 됩니다. 젊은 작가들은 언제나 “자기 목소리를 찾는다.”라는 말을 하는데요, 귀를 기울이지 않고는 스스로의 목소리를 찾을 수가 없어요. 우리의 글쓰기 가르침은 그걸 무시하는 경향이 있죠. 아마도 시만 빼고요. 덕분에 우리는 덜컥거리는 산문을 만들어내면서도, 뭐가 잘못됐는지를 몰라요. 그러자 정말로 평화가 찾아왔다. 바다에서 해변으로 평화의 메시지가 불어왔다. 세상의 잠을 더는 깨뜨리지 않고, 오히려 더욱 깊이 잠들어 쉬도록 달래며, 꿈꾸는 이들이 무슨 꿈을 꾸었는지 성스럽게 확인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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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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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와 매체>

어떤 사안을 역사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을 대응으로, 논쟁으로 파악함을 뜻한다.청취자는 오락을 원한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라디오방송이 제공할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교훈적 구성의 무미건조함과 그 전문가적 편협성에 ‘난잡한’ 구성의 수준 미달과 그 빈약함만이 호응했다.오페라 관객, 소설 독자, 유람객, 이와 유사한 유형 등에서 나타나는 소비 성향의 무한한 형성과 더불어 둔감하고 표현이 없는 대중, 곧 자신의 판단에 대한 척도도, 자신의 느낌에 대한 언어도 없는, 그야말로 좁은 의미에서의 공중이 창출되었다.연극과 라디오 - 이 두 제도를 편견 없이 고찰하는 경우,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바는 조화의 감정은 아닐 것이다. 이 둘 사이의 경쟁 관계는 라디오와 콘서트홀 사이 관계만큼 그리 첨예하지는 않다. 그러나 애초부터 이 양자 사이에 공동 작업이 진척될 수 있기에는 한편으로는 라디오의 활동이 갈수록 더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을, 다른 한편으로는 연극의 곤궁함이 갈수록 비대해진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라디오는 연극에 비해 더 새로운 기술뿐 아니라 동시에 더 노출되는 기술을 재현한다. 라디오는 아직 연극처럼 고전 시기를 겪지 않았다. 라디오가 장악하고 있는 대중의 규모는 훨씬 더 크며, 무엇보다도 기계장치의 근거인 물질적 요소들과 공연물의 근거인 정신적 요소들이 청취자의 관심사에 맞게끔 서로 아주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는 점이 결정적이다. 그렇다면, 이에 비해 연극이 다른 저울판에 올려놓을 만한 것은 무엇일까? 살아 있는 수단의 투입 – 이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라디오방송이 열어놓은 기술적 가능성, 곧 같은 시간에 무한한 대중을 상대하는 힘으로 대중화는 선의의 인간 친화적 의도를 지닌 성격을 뛰어넘어 번창했고, 현대 광고기술은 이전 세기의 시도들과 차별성을 보이는 것 못지않게 자기만의 종형 법칙들로 옛 숙련방식과 뚜렷한 대조를 보이는 것을 과업으로 삼았다.통속성과 대중성은 좀 더 확실히 구분해야 하나 이를 간단히 말하자면 통속성이란 예술적 교양이 없는 일반 속중에게 저렴한 관심과 감격을 주는 요소를 담은 것이며 대중성이란 이러한 속중이 아닌 계급으로서의 일반 사회계층의 의욕 및 호의를 목표로 하여 인간으로서 소박하고 건전한 감성에 이를 수 있는 단순 양명한 예술적 요소를 주로 삼는다고 해두겠다. 하지만 대중적으로 만들려다 통속성에 빠지는 것처럼, 통속적이기에 이따금 빠지는 비참함이란 그게 대중적이지 못하단 점이며 동시에 진정한 보편성을 잃는다는 데 있다.몇 달간의 지원 후에, 나는 한 방송국으로부터 내 전문 분야를 주제로 20분간 청중과 환담을 나누어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내 담소가 공감을 얻어낼 경우를 생각해, 그들은 이번과 같은 보도의 정례화도 약속했다.초보자는 다소 대규모의 청중 앞에서 말하고 있다고 믿는 우를 범합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전도된 생각은 없습니다. 라디오 청취자는 거의 항상 개별자이고, 당신은 수천 명을 상대한다고 가정해도 늘 수천 명의 개별자와 연결될 뿐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늘 마치 한 사람에게 –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다수의 개별자에게 말을 거는 듯 한 태도를 취해야지 결코 다수의 군집자를 대하는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학문적으로 가능한 한 폭넓은 독차층에 다가가려면 지식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 가장 훌륭한 교훈을 준 것이 현대물리학을 대중화한 위대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독자를 놀이와 융합했고, 또 독자에게 앞서 나아가고 있다는 감각을 주었다. 이러한 확신은 단연코 소재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 독자에게...
Memo
2024. 0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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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의 넓이와 깊이>

르네상스 문학이 고전에서 인간 정신의 자유분방한 표현을 강조한다면, 신고전주의는 일반적으로 자연의 보편성, 조화, 균형, 합리성을 따른다. 신고전주의는 인간의 제한성이나 불완전성을 강조하고 비합리적 열광의 위험성을 이성으로 제재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신고전주의는 문학의 법칙을 강요했다. 특히 모든 문학은 정확히 장르의 구별이 있으며, 모든 장르는 그에 해당하는 규범이 있어서, 그 규범을 운용하는 법을 철저히 익히지 않으면 작품을 만들 수 없다고 했다.   르네상스 문학이 고전에서 인간 정신의 자유분방한 표현을 강조한다면, 신고전주의는 일반적으로 자연의 보편성, 조화, 균형, 합리성을 따른다. 신고전주의는 인간의 제한성이나 불완전성을 강조하고 비합리적 열광의 위험성을 이성으로 제재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신고전주의는 문학의 법칙을 강요했다. 특히 모든 문학은 정확히 장르의 구별이 있으며, 모든 장르는 그에 해당하는 규범이 있어서, 그 규범을 운용하는 법을 철저히 익히지 않으면 작품을 만들 수 없다고 했다.   르네상스가 인간 정신의 부활이라면, 바로크는 인간의 미적 계몽의 성격을 갖는다. ‘판에 박힌 표현’이라는 의미의 ‘토포이’는 고전 수사학에서 문학적 상투어나 관례를 나타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토포이를 웅변가가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중요한 기법으로 간주했다. 유럽 문화의 영향 하에 있는 러시아 작가들은 바로크 시대에 유행했던 토포이를 자연스럽게 수용했다. 외관상으로 볼 때 데르자빈 시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시의 소재나 주제는 한정되어 있다. 데르자빈의 시에 나타난 대표적인 바로크적 토포이로는 ‘카르페디엠(현재를 즐겨라)’, ‘메멘토모리(죽음을 기억하라)’, ‘바도 모리(죽음을 향해 간다)’, ‘우비슨트(어디 있는가?)’, ‘브레비타스 비타이(인생은 짧다)’, ‘바니타스(인생은 꿈이다)’ 등이 있다. 거짓말에는 세금이 없다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계몽주의 - 인류 스스로 만들어 낸 미성년 상태로부터 인류를 해방하려는 노력이며,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기 오성을 사용하려는 결의와 용기 러시아 감상주의는 시민계급의 출현과 맞물려 있다. 시민계급의 출현으로 새로운 진보적 도덕관과 새로운 미학 원칙이 탄생했고, 예술작품에서 귀족이 아닌 일반 민중의 내면세계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감상주의 미학은 고전주의 미학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차가운 이성은 감정의 시체일 뿐이었다. 개인의 감정이 이성과 지성에 맞먹는 인식력으로 인정되었다. 인간의 존엄성이 사회적 지위에 따라 평가되던 고전주의와는 달리 감상주의에서는 인간의 내적 자질들로 가치를 평가하게 되었다. 근대 서구미학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준 것은 무엇보다도 프랑스 혁명이라는 정치적 혁명이었으며, 따라서 문학은 명시적, 묵시적 차원에서 그 사건과 적지 않게 관계해 왔다. 흥미로운 현상은 프랑스 혁명 후 바로 그 정치적인 혁명이 ‘심미적인 혁명’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심미적인 혁명은 도덕적이고도 정신적인 차원에서의 변화를 뜻한다. 진실의 가장 큰 적은 거짓이 아니라 신화다. 즉, 진짜 적은 가장된 진실이다. 꿈은 영적 공명이 일어나는 경계선의 공간이다. 꿈에서는 산 자와 망자가 만나고, 현실 세계의 모순이 특별한 방식으로 용인된다. 장의사는 타인의 죽음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직업이다. 장의사는 고객들의 죽음 덕분에 살아간다는 역설이 아주 흥미롭다. 인간의 욕망에는 끝이 있을까? 욕망은 수평선과 같아서 다가서면 또 다른 욕망이 생기기 마련이다. 욕망은 종종 신기루처럼 생겨났단 허망하게 사라지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욕망의 사슬에서 해방되지 못한다. 해방되지 못한 욕망은 희생물을 요구하고, 끝끝내는 자신이 제물이 되어 파멸한다. 푸시킨의 <스페이드 여왕>은 도박으로 벼락부자가 되겠다는 한 인간의 탐욕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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