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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의 말>
은둔지Memo

<김혜순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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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기계
2024.08.22조회수 3회

문학은 질문이기에, 이 책을 완성한 건 내가 아니다.


시는 상상적 공간, 문학적 공간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입니다.


시인이란 존재는 본래 죽음에의 선험적 직관을 표출하는 존재이지만, 그래서 내내 자신의 끝을 미리 살아내는 존재이지만, 이 시기에는 제 자신의 죽음으로서의 저를 좀 더 확실히 느낀 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이 시들을 쓰면서 저는 죽음 후의 ‘나’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는 시적 경험을 하게 되었지요. 그러자 복수의 화자가 말을 하는 시끄러운 시들이 폭주했습니다.


돼지처럼 오직 몸만 있는 존재를, 그 몸의 태어남과 죽음과 차별받음, 분류당함, 손가락질당함, 매질당함, 고문당함을. 그 몸을 함부로 다루는 시선과 손가락질과 고문하는 국가체제를. 그때 저는 시를 쓰면서 저의 몸, 저의 돼지를 생각했습니다. 냉랭한 시선들을 끌어 모아 만들어진, 세상에서 제일 차갑고 잔인한 무기인 거울 앞에 선 알몸 하나를, 바라보니 명명을 벗은 알몸 하나만이 저의 ‘지금’이었습니다.


김수영 시인의 <눈>에서 “눈은 살아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라는 구절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김수영이 생각한 죽음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저는 김수영이 죽음을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같은 상태라 지각했다고 생각합니다. 김수영이 생각하기에 죽음을 잊어버린 젊은 시인은 시인이 아니었지요. 그러니 죽음을 잊어버리지 않은 시인은 눈에게 살아있다고, 아직 죽지 않았다고, 죽음으로 살아 있다고 마음껏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김수영에게는 죽은 자야말로 시인이고, 가래를 뱉을 수 있는, 죽음으로 산 자였지요.


증기로 만든 뼈대 같은 것들이 겨우 남아 있지요. 바로 그 상태에 이르는 것이 시라고 생각합니다.


두 옥타브 올라갔다가 세 옥타브 떨어지는 바람.

 

죽음만큼 아무 ‘의미’가 없는 사건이 있을까요?


불면은 낮의 그림자에요. 이것을 꺼야 우리는 잠에 들 수 있지요. 저는 이것을 끄지 못해 밤이면 안달합니다.

 

소낙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밤, 천막 속에 노래가 있고 춤이 있고 신들림이 있었습니다. 죽은 신어머니의 부름을 차례대로 받는 그들을 보고 있으니 문회한인 저도 누가 더 비가시계를 다녀오는 데 능통한지 알게 되었어요.


무당이 죽은 영혼의 억울함과 슬픔을 자신의 몸에 얹어 발설하는 것.


그동안 우리가 다른 인간 타자의 몸을 포함해 우리의 몸을 어떻게 시선으로 체포하고, 어떻게 폭력으로 다루어왔는지를 반성했습니다.

 

스님의 말씀이 가부좌한 우리에게 떨어질 때마다 제 몸이 그렇게 비루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동물을 결핍의 존재, 언어 없는 미물, 응답 없는 주체로 느끼고 판단해왔지 않습니까? 마치 남자들이 여자들을 그렇게 느꼈듯 말입니다. 휴머니즘이 버린 두 존재가 동물과 여자라는 향간의 말이 있지 않았습니까?


시를 말하면서 수많은 서양 철학자, 시인의 인용을 거느려 말하고, 시를 쓰면서는 은유 구조 안에 모든 시 구절을 복속시키고, 저는 그런 시를 읽으면, 이 시인은 자기를 높은 위치에 두는 남성성의 시를 쓰는구나, 그렇게 여기지요.


저는 시를 쓰려면 어떤 몸의 ‘상태’가 되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모르게 어딘가에 들린 상태, 몸무게가 조금 빠져나간 상태, 그때 몸에서 이전과는 다른 리듬이 시작되면 시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다음 생각 사이로 물이 흐르지요. 어떤 작가가 이 들린 상태를 아주 쉬운 것처럼 얘기하는 것을 읽은 적이 있는데, 물론 이 들림이 핑계거리로서 아주 좋은 대답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들리기’ 위해서는 죽음과 같은 고통의 시간을 지나야 합니다. 무당들이 무당이 되기 전에 죽을 만큼 아픈 기간을 거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이 남의 죽음에 동참하기 위해 자신의 죽음과 같은 고통을 거쳤다는 것을 간과해버릴 수는 없지요.


시에서의 리듬은 시가 전개하는 시간이고, 에너지와 긴장, 현기증입니다. 그 리듬 안에 시의 미학과 윤리학이 작동할 겁니다. 물론 리듬은 신이 우리에게로 걸어오는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걸 시인이 받아 안는 것이지요.


리듬은 시 속의 언어들과 그 언어들 때문에 언어 밖에 있게 된 입자들의 흐름이며, 그 흐름의 방식, 수학입니다. 리듬은 규칙이 아니라 생성입니다. 리듬이 시 안에서 시인을 잉태하고, 시인을 분만합니다.


내밀성으로 깊이깊이 침잠해가는 무한수열의 고통. 그 끝에 제 몸의 기관을 하나하나 만들었으나 지금은 부재하는 어머니의 몸 같은 존재가 있다는 걸 보았다고나 할까요. 아마도 제 몸을 만드신 이는 자신의 몸이 지닌 리듬을 나누어 ‘나’를 만들었을 겁니다. 리듬이 쓸개가 되고, 리듬이 허파가 되었을 겁니다.


그 시를 쓰면서 우리 인간들의 구멍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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