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이 책과의 만남은 정말이지 ‘떠오름’의 경험처럼 느껴졌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성취는 정신적 고통이 사회 전반의 구조적인 결함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시사한 것이었다. 우리 모두가 궁극적으로 혼자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조장하는 정치 체계가 지배하는 상황에서 이 책은 우리 모두가 함께 고통받고 있다고 단언했다. 우리가 이를 깨닫고 어떻게든 고난을 극복하고자 결합한다면 21세기 현재 거의 망각된 것처럼 보였던 것, 즉 조직적인 저항을 위한 첫걸음을 내딛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책이 함축하고 있는 정치적이고 이론적인 뉘앙스가 무엇이든, 가장 기본적인 층위에서 이 책은 서로 손을 맞잡을 것을 요청하고 있었다.
장르 불문 대부분의 글과 달리 이 책은 유아론, 아이러니, 자아에 매몰되지 않았다. 그 대신 이대로는 안 된다는 단순한 믿음으로 뭉친 사람들의 공동체를 상상했으며, 이 상상된 공동체가 머지않아 세상을 변화시킬 사회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감질나는 가능성에 기대를 걸었다.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면 피카소의 <게르니카>,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미래 세대는 더 이상 알리바이가 될 수 없다.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답은 니힐리즘적 쾌락주의다. “그것까진 생각하지 않으려 해.”
스마트폰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몇 년 앞서 이뤄진 이 분석은 포스트모던 자본주의 사회가 겉보기에 자유주의적임에도 불구하고, 혹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21세기 청년 문화가 서서히 시들었음을 정확히 짚어 냈다.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던 시절에는 억압의 어휘조차 부정되었고, 그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이 느꼈지만 거의 언어화되지 못했던 사회적 통제 형태에 이름을 부여한 마크의 능력에는 근본적인 힘이 있었다.
가장 사소한 사건들도 자본주의 리얼리즘 아래서 가능성의 지평을 장악해 온 그 반동의 회색 장막에 구멍을 낼 수 있다.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다시 한 번 무엇이든 가능해지는 것이다.>
앞선 10년의 심드렁한 무관심을 대체하는 새로운 전투적 분위기가 덮치자, 이 유토피아적인 슬로건에 담긴 낯설고 놀라운 현재 시제 형식들이 강력한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갑자기 정말로 다시 한 번 무엇이든 가능해질 것만 같았다.
세계적인 점령 운동도 대체로 역사적 골동품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의 아래에서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구조적 취약성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위기를 낳았다. 자본주의 정부들은 어떻게든 버텨 왔지만 뚜렷한 대안이 없다.
생태 재앙이 그 어느 때보다 훨씬 더 확실하고 임박한 위험으로 다가오는 지금, 마크가 빌려 쓴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격언은 한층 더 절절해졌다.
<칠드런 오브 맨>은 영화적 디스토피아가 판에 박은 듯 내놓는 그 익숙한 전체주의 시나리오(가령 ‘브이 포 벤데타’)와는 다르다. <칠드런 오브 맨>이 기반하고 있는 소설에서는 민주주의가 유보되고 있으면 통치자를 자처하는 워든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