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후에, 지에게
최승자
지금 네 눈빛이 닿으면 유리창은 숨을 쉰다.
지금 네가 그린 파란 물고기는 하늘 물 속에서 뛰놀고
풀밭에선 네 작은 종아리가 바람에 날아다니고,
이상하지,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빈 벌판에서 차갑고도 따스한 비를 맞고 있는 것 같지.
눈만 뜨면 신기로운 것들이 네 눈의 수정체 속으로 헤엄쳐 들어오고
때로 너는 두 팔 벌려, 환한 빗물을 받으며 미소짓고
이윽고 어느 날 너는 새로운 눈을 달고
세상으로 출근하리라.
많은 사람들을 너는 만날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네 눈물의 외줄기 길을 타고 떠나가리라.
강물은 흘러가 다시 돌아오지 않고
너는 네 스스로 강을 이뤄 흘러가야만 한다.
그러나 나의 몫은 이제 깊이깊이 가라앉는 일. 봐라,
저 많은 세월의 개떼들이 나를 향해 몰려오잖니,
흰 이빨과 흰 꼬리를 치켜들고
푸른 파도를 타고 달려오잖니.
물려 죽지 않기 위해, 하지만 끝내 물려 죽으면서,
나는 깊이깊이 추락해야 해.
발바닥부터 서서히 꺼져들어가며, 참으로
연극적으로 죽어가는 게 실은 나의 사랑인 까닭에.
그리하여 21세기의 어느 하오,
거리에 비 내리듯
내 무덤에 술 내리고
나는 알지
어느 알지 못할 꿈의 어귀에서
잠시 울고 있을 네 모습을,
이윽고 네가 찾아 헤맬 모든 길들을 가다가
아름답고 슬픈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의 동냥바가지에 너의 소중한 은화 한 닢도
기쁘게 던져 주며
마침내 네가 이르게 될 모든 끝의
시작을!
당사자가 '나는 불행하다'고 말한다 해서 타인이 아무 때나 '그는 불행하다'라고 말할 자격을 얻는 것은 아니다. 당사자가 그 말을 할 때에는 신세한탄의 형식을 취한다 해도 그것이 자기 직시의 효과를 발휘해 자신의 현재를 극복하는 첫걸음이 될 수도 있겠으나, 타인이 그런 말을, 그것도 그를 그 불행에서 끌어내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의사도 없이 할 때는, 그런 말이 그가 미래의 다른 자신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을 꺾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보는 세계는 경이롭다. 세계 그 자체가 본래 경이롭다기보다는 세계를 경이롭게 볼 줄 아는 아이의 눈이야말로 경이로운 것이다. 훗날 아이가 자라면 "새로운 눈"을 달고 세상에 출근해야 하겠지만, 적어도 지금 아이에게 주어진 삶은 아름답기만 해야 마땅하다.
시인은 자신에게 남은 것이 "깊이깊이 가라앉는 일"뿐이라고 단언한다. 그 예정된 결론을 바꿀 수는 없으며 다만 거기에 이르는 과정을 어떻게 연출하느냐 하는 일만이 그가 관심을 쏟음직한 유일한 일이라는 말과 함께.
이 시의 긴장은 거기서 나온다. 어린 '지'에게 생에의 찬가를 들려주고 싶지만 삶의 진실은 비가 쪽에 있다는 생각 말이다.
입원 중이었던 2010년 당시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몸무게 34킬로그램의 그는 자신의 삶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며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해 나를 전율케 했다.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 그 말을 할 때 그는 이번 생의 승자처럼 보였다.
소네트 73
윌리엄 세익스피어
한 해 중 그런 계절을 그대는 내게서 보리라,
전엔 예쁜 새들이 노래했지만 이젠 황폐한 성가대석,
추위를 뎐디며 흔들리는 가지들 위에
누런 잎들 하나 없거나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계절을.
내게서 그대는 보리라, 해가 진 후
서녘에서 스러지는 그런 날의 황혼을,
만물을 휴식 속에 밀봉해버리는 죽음의 분신인
시커먼 밤이 조금씩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