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울, 베드로, 스데반 그 누구도 부활의 증거로 빈 무덤을 가리키지 않았습니다. 부활의 증거는 성령 충만한 이들의 친교였습니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거기에 적응했다는 말일 겁니다.
적응이란 그런 삶을 자기 삶으로 수납했다는 뜻이고요.
말없는 시인의 모습에 불안감을 느낀 그들은 시간이 갈수록 두 부류로 나뉘게 됩니다. '공격적 질문자'와 '심각하게 침묵하는 자'로.
정의를 내치든지 이익을 내치든지
영혼을 내치든지 성공을 내치든지
젊은 날에 두 개의 길은 없다고
박노해 시인의 말은 우리 삶의 근본 문제를 건드리고 있습니다. 너무 가차 없어서 가슴이 다 서늘해집니다.
복음서에 그토록 많은 환자와 귀신들린 사람이 등장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만성적인 영양실조는 질병을 낳게 마련입니다.
게다가 로마가 저지른 잔인한 폭력에 대한 기억을 견딜 수 없었던 사람들은 정신이상 증세를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로마의 지배를 운명처럼 받아들이던 시대에 그 체제의 악마성을 사람들에게 일깨우셨습니다. 힘으로 다른 이를 억압하고, 가차없이 빼앗고, 그것으로 소수의 사람만 풍요로움을 누리는 세상은 부정되어야 할 디스토피아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이 다행일까요, 불행일까요? 그건 각자 삶으로 답해야 할 문제입니다.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몸으로 체현하는 이들이야말로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에게 붙여졌던 별명에 합당한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천하를 어지럽히던 자.'
회의는 비신앙이 아니라 더 깊은 인식에 이르기 위한 통로입니다. 회의라는 통과제의를 거치지 않은 신앙은 마치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아서 단 한 번의 타격으로도 무너질 수 있습니다. 교리 혹은 교회의 가르침은 누군가의 머리를 덮는 쇠항아리가 될 수 있습니다.
작가 게오르규는 20세 때 잠수함 수병으로 근무했던 자신의 경험을 반추하면서, 잠수함 한가운데 있는 통에 토끼가 들어 있었다고 말합니다. 토끼는 잠수함 내의 산소 함량을 진단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산소가 모자라면 토끼는 대략 사람보다 7시간 먼저 죽는다는 것입니다. 게오르규는 시인이란 잠수함 속의 토끼와 같은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시인이 괴로워하면 그 사회는 병들어 있다는 것이지요.
가난해서 안식일에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람들, 고달픈 나날을 잊기 위해 때로는 폭음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

그리스도교 사회에 대한 명백한 탄핵 이야기를 읽고 부끄러움에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자신의 태도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세상은 종종 잊게 만드는 듯 합니다. 저도 인류를 사랑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일상에서 이웃들의 사소한 실수에 화를 내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스스로의 이중성에 실망하곤 합니다. 사랑과 증오의 연쇄가 반복되면, 마치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으려 합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사람이라면,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배려하는 이 길 밖에는 없으니까요. Pioneer님의 댓글 덕분에 이웃 사랑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깊게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항상 따뜻한 댓글 달아주셔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댓글 좋아요 기능은 왜 없는 걸까요… 우연히 들른 블로그에서 우연히 누른 글을 읽으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마음이 무거워짐과 동시에 따뜻한 위로를 받고 갑니다. 독서 기록으로 발췌하시는 글들이 다 너무 좋은 글들이라 구독하고 갑니다!

'바울, 베드로, 스데반 그 누구도 부활의 증거로 빈 무덤을 가리키지 않았습니다. 부활의 증거는 성령 충만한 이들의 친교였습니다.' 크리스천으로써 이 글이 참 공감됩니다.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