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3시. 나는 이 순간을, 그리고 다음 순간을 인지한다. 나는 매 순간을 결산한다.
이 모든 것은 무엇 때문인가? - 왜냐하면 내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태어남을 문제 삼게 되는 이 특별한 유형의 잠 못 이루는 밤.
우리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태어났다는 재난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태어남을 재난으로 여기는 생각은 혐오스럽다. 분명히 그렇다. 사람들은 태어남을 최고의 선이며, 최악의 것은 우리 생애의 시작이 아니라 끝에 위치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우리에게 주입시키지 않았던가?
그러나, 나쁜 것, 진짜 나쁜 것은 우리 앞이 아니라, 우리 뒤에 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는 간과했으나, 부처가 간파했던 것이다.
"오 제자들이여, 만일 세상에 삼고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여래는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작품을 하나 만들어내려고 억지로 애를 써서는 안 된다.
다만, 술주정뱅이나 죽어가는 사람의 귀에 대고 속삭일 수 있는 무엇인가를 말해야 할 뿐이다.
시작 안에서 끝을 볼 때, 인간은 시간을 앞서간다.
깨달음, 번개처럼 후려치는 좌절은 각성한 인간을 해방된 인간으로 변화시키는 확실성을 가져다준다.
환멸에 대한 나의 능력은 이해력을 넘어선다. 나로 하여금 부처를 이해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 능력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로 하여금 부처를 따를 수 없게 만들기도 했다.
우리가 더 이상 연민을 느낄 수 없는 그 무엇, 그것은 중요하지 않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가 왜 그렇게 빨리 우리에게 속하기를 그치고 역사의 형태를,
더 이상 자신과 상관없는 무엇인가의 모습을 가지게 되는지 알아차린다.
존재들 사이의 진정한 접촉은 말 없는 현존, 표면적인 비-소통, 내면적인 기도를 닮은 신비하고 말없는 나눔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내가 예순 살에 알았던 것, 나는 그것을 이미 스무 살에도 잘 알고 있었다. 그 확인을 위한 40년에 걸친 길고 불필요한 작업.
서정성을 거부할 때, 백지를 검은 글자로 물들이는 일은 고통스럽다.
이전에 말해진 것을 똑같이 말하기 위해 쓴다는 것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우리보다 덜 고통받은 사람이 우리를 심판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사유는 결코 순결하지 않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속박을 날려버리도록 도와준다.
그것이 가지고 있는 악마적인 측면을 제거해버린다면, 해방의 개념 자체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내면 탐색의 능력을 가진 사람을 알아볼 수 있다. 그는 모든 성공보다 실패를 우위에 둔다. 실페를 추구하기까지 하고, 그 실패 때문에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왜냐하면, 실패는 언제나 본질적인 것이므로,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 드러내 보여주며, 신이 우리를 보듯이 자신을 보게 해주기 때문이다. 반면에 성공은 우리 안에, 그리고 모든 것 안에 있는 보다 내밀한 것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만든다.
태아난다는 사실 안에는 너무나 필연성이 없어서, 그것에 대해 평소보다 조금 더 생각하게 될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지 못하므로, 사람들은 멍청한 미소나 짓고 말 뿐이다.
다른 이들이 잠의 먹이가 되는 시간에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사람에게는 그의 생각의 결론이 유익한 것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 그래서 그는 그가 자신이나 타인에게 가져올 수 있을 해악에 대해서는 마음 쓰지 않고 태어났다는 사실의 불운을 반추한다.
자정이 지나면 위험한 진실의 도취가 시작된다.
죽음에 관해서 나는 '신비'와 '아무것도 아님', 피라미드와 영안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린다.
사람들이 '지혜'라고 부르는 것은 본질적으로 '곰곰히 생각해보기'일 뿐이다.
나처럼 자신의 해골을 가까이 껴안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끝없는 대화 하나가, 그리고 내가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몇 개의 진실이 생겨났다.
덕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악덕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 더 쉽다. 본성적으로 악덕은 서로 돕고, 다른 악덕에 아주 너그러운 반면, 덕은 질투심이 강해서 서로 싸우고 서로 죽이고, 모든 점에 있어서 양립 불가능성과 불관용을 드러내 보인다.
내가 결국은 언제나 최근의 적을 닮게 된다는 사실을 자각한 이래로, 나는 이제 아무도 탓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유혹자 마라가 부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애쓸 때, 부처는 이렇게 물었다.
"무슨 권리로 너는 인간과 우주를 지배하려 하느냐? 너는 깨닫기 위해 고통을 당한 적이 있느냐?"
이것은 누구에 대해서나, 특히 사상가에 대해 질문을 던질 때, 떠올려보아야 할 유일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숨기는 것만이 심오하며 진실한 것이다. 천박한 감정이 강렬한 것은 그 때문이다.
빛이 새벽에서 멀어져 낮을 향해 나아갈수록, 빛은 타락한다.
사라지는 순간이 되어서야 빛은 속죄한다.
가장 생생한 실패의 순간, 수치심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