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둔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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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지
기독교는 사랑에 보답을 약속함으로써 타락해버렸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알아버린 거지.
고통에 의미가 없었기에 우리가 부여해야 했다. 먼 옛날 인류가 몇 개의 뿌리였을 때,
우리의 공통 조상이 동굴에 숨어, 내리치는 벼락에 제우스의 진노라는 의미를 부여했듯이.
생소한 이야기로 다가오겠지만, 고통이란 건 인간의 이기심이 극한까지 소용돌이 치는 걸 막기 위해 고안된 하나의 장치다. 그게 번개가 내리치듯 창조에 의해 이루어졌든, 영겁의 시간 동안의 진화로 이루어졌든 도대체 그게 무엇이 중요하겠나.
중요한 건 그놈의 균형을 위해 - 기쁨과 사랑의 과잉인 '쾌락'과 '광기'의 대극이 필요했기에, 위대하신 야훼께서 혹은 ?께서 창조질서에 포섭하신 훌륭한 장치란 생각이 든다.
다시 한 번, 중요한 건 균형이다.
그러나 장치로서의 고통은, 공허한 울림에 불과하다. 의미 없는 무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통증만으로 변화할 수 없다. 여기에는 분명 '의미'가 필요하다.
그래서 고통을 반석으로 하는 '불행'이 창조되었다. 필요하다면, 그것은 창조되기 마련이다.
불행은 텅 빈 고통에 밀도를 부여하고, 진실함의 시금석이 되었다.
불행은 존재의 깊이를 드러내는 거울이며, 인간은 그 안에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