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창기부터 영화는 사회정치적 삶에서 주변화되고 망각된 민중의 삶을 카메라에 담아왔다.
에이젠슈테인의 혁명 군중, 도브젠코의 우크라이나 농부들, 채플린과 버스터 키튼이 극화한 미국 하층 계급 노동자들과 도시 빈민, 미조구치 겐지의 여성들, 비토리오 데시카, 로셀리니가 그린 이탈리아 민중의 얼굴들.
민중의 의복과 음식, 집과 노동 현장, 머리칼과 피부, 더듬거리는 언어, 지배자들과의 대립과 투쟁. 이 모든 민중적 생명의 세부들이 영화의 등장과 더불어 사회의 집합 기억에 등록되기 시작했다. 이때, 인민의 얼굴은 영화적 진리가 서리는 특권적 장소가 된다.
파솔리니의 <마태복음>(1964)은 예수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민중에 대한 영화가 아닌가? 도입부에 나오는, 반항적인 듯하면서 수수께끼 같은 어린 마리아의 표정. 고난에 깎이고 피로에 부식되었지만 형형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쏘아보는 히브리 민중들. 파솔리니가 그린 예수, 그의 언어, 그의 진리는 정작 인민의 저 강렬한 얼굴 앞에서 범상해 보이기까지 한다.
감독의 카메라가 민중의 아픔을 치유하려는 듯, 이해하려는 듯, 사랑과 경의를 품고, 그들의 얼굴을 어루어만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신학은 언제나 민중신학이다.
거친 자연 풍광을 스크린의 실질적 주인공으로 끌어들이는 경향은 사실 중국의 5세대 감독들에게 공통된 것이다. 이들은 주로 "산시와 간쑤 같은 서부 지역의 눈에 익숙하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