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희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희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켈리 레이카트는 미국 독립 영화계의 독보적 감독이다. 항상 재정 압박을 받으면서도 작가적 주권을 포기하거나 상업적인 타협을 한 적이 없는 레이카트는 오직 "외부의 간섭 없이 예술을 창조하는 것"을 꿈꿨다. 그 결과 메인스트림 상업 영화와 명확한 대립각을 이루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영화 세계를 창조하는 데 성공한다.
그의 영화는 주로 21세기 미국 민중의 불안정한 삶을 그린다. 이런 점에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를 연상시키도 한다. 하지만 네오리얼리즘 특유의 인간적 온기와 낙관성은 레이카트 영화에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대신 거기서 우리는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차가운 세계를 살아가는 피폐하고, 빈곤하고, 고통에 짓눌린 자들의 마비된 불행을 본다. 영화의 주된 배경인 북서부 풍경도 황량하고 황폐하고 쇠락해 있다. 도시건 사막이건 숲이건, 낙후와 조락의 분위기는 일관적이다.
느린 카메라가 보여주는 이 어두운 리얼리티는 '사회적' 파괴상과 '생태적' 파괴상의 중첩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회와 자연이 동시에 해체되는 느리고 고요한 파국. 이것이 레이카트 영화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세계의 얼굴이다.
레이카트의 스타일은 흔히 "느린 보폭의 리얼리즘"이라 불린다. 사실, 그의 영화에는 특별한 사건이나 스펙터클, 극적 전개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관조적이고 섬세하고 미니멀하다. 대화는 나직이 중얼거려진다. 롱테이크가 자주 사용되고 스토리텔링도 친절하지 않다. 인물의 본성이나 이력도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 속 많은 장면에서 우리는 "고요, 공백, 텅 빔, 침묵"을 접한다. 그에게 느림은 단순한 미학적 효과나 아방가르드적 실험의 의미를 넘어서, "영화가 아니었다면 놓쳤을 사물들과 사람들을 보게"하는 가시화 장치로 기능한다. 가속이 규범이 된 세계에서 느린 영화는 속도와 변화에 의해 주변으로 밀려난 채 소외된 풍경과 인간의 진실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레이카트 영화가 가시화하는 두 대표적 대상은 세계의 '파국'과 거기 떠도는 인물의 '불행'이다.
파국은 주로 '집(eco)'의 소실, 파괴, 해체의 형태를 띤다. 여기서 집은 인물들의 실제 가정을 의미할 수도 있고, 경제의 에코나 생테의 에코를 가리킬 수도 있다. 어떤 형태건 간에 레이카트의 세계는 성장하고 진보하는 대신 붕괴하는 세계다. 경제적으로 쇠락하고 생태적으로 파괴된 세계. 이러한 에코의 결손은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을 항시적 이동 상태로 몰아넣는다. 그들은 빈곤하고, 불안정하며, 길 위에 있다. 허망한 도주선들이 영화를 이리저리 가로지른다. 인물들의 불행은 이 존재론적 불안정성에서 온다.
영화의 배경이 된 소도시에는 지진, 폭동, 테러, 전쟁처럼 흔히 파국이라는 용어로 상상되는 그런 사건들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굳이 찾아보자면 차가 고장 난 것, 사료를 훔치려다 유치장에 갇혔다가 풀려난 것, 강아지 루시가 잠시 실종된 것이 사건의 전부다. 앙드레 바쟁이 비토리오 데시카의 <자전거 도둑>(1948)에 대해 썼던 한 논편을 빌려 말하자면, 이 영화에는 "신문 사회면 기사의 재료조차도 없다."
하지만 도시 이곳저곳을 배회하는 주인공 웬디를 카메라가 따라갈 때, 마치 음화에 찍힌 이미지들이 인화액에 반응하며 드러나듯, 도시의 실질적 사회 상태들이 가시화된다. 거기에는 국가도 사회도 커뮤니티도 없다. 경찰서의 지문 기계는 고장 났고, 차량 정비소도, 실종 동물 보호소도 닫혀 있다. 황량한 거리에는 쓰레기들 주워 파는 자들이 배회한다. 도시를 공적 공간으로 만들어주는 원리에 손상이 가해진 듯하고 해체의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 파국은 사건이 아닌 과정으로, 예외가 아닌 정상 상태로, 자각되는 사실이 아닌 일종의 무드처럼 도시 전체에 분자적으로 스며 있다.
웬디에게 남은 것은 자신의 몸뚱이 하나와 그가 종종 흥얼거리는, 기원을 알 수 없는 평범한 멜로디 하나뿐이다. 이 흥얼거림은 웬디의 남루한 실존의 경계를 희미하게 표시한다. 하지만 웬디는 언젠가 저 최후의 소유물마저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웬디의 모든 여정은 삭감과 소멸과 사라짐을 향한 이동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웬디는 그저 빈곤한 자, 박탈된 자, 고통스러운 자가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충분치 않아 보인다. 그 이상의 뭔가가 웬디에게 새겨져 있다. 지울 수도 없고, 제거할 수도 없는, 어떤 사악한 힘. 가령 우리가 불행이라 부르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