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의 영성 - 코엔 형제와 아키 카우리스마키

유머의 영성 - 코엔 형제와 아키 카우리스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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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기계
2025.04.04조회수 2회

아주 어린 시절부터 무덤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 존재의 마음속 깊은 곳엔, 그가 보고 겪고 고통당한 모든 피해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에게 악이 아니라 선을 행하기를 굴하지 않고 기다리는 무엇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서 성스러운 건 다른 어떤 게 아니라 바로 이것입니다.


코엔 형제의 <시리어스 맨>(2010)은 1960년대 미국의 한 유대인 공동체에 사는 물리학 교수의 이야기다. 래리 고프닉. 칠판 가득 수학 방정식을 풀어가며 양자역학을 강의하는 그는 선량하고 평범한 중년 남자다. 제목이 알려주듯, 무척 진지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평온해 보이던 그의 일상이 갑자기 닥쳐온 문제들에 의해 흔들리기 시작하고, 그는 랍비들을 찾아간다.




첫번째 만난 주니어 랍비 스콧은 래리의 이야기를 듣더니, 대뜸 세상을 보는 시각을 바꾸라고 조언한다. 래리는 항변한다. 자신이 비뚤어진 게 아니라 지금 너무나 황당한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고 있지 않느냐고. 랍비는 그게 인생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러고는 뜬금없이 사무실 밖의 주차장을 바라보라 권한다. 차들이 드문드문 오가는 저 평범한 주차장에도 신이 있다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섭리로 가득하다고. 시각을 바꾸면 세상의 섭리를 깨닫게 된다고. 래리는 내심 저 젊은 랍비가 아직 인생 경험이 없어 저렇게 원론적인 조언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두번째로 만난 랍비 나흐트너는 좀더 고수다. 그는 예전에 상담을 했던 한 치과의사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의사는 우연히 환자 앞니 안쪽에서 이상한 글자를 발견했다고 한다.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라는 히브리어 단어들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놀란 치과의사는 고민에 빠진다. 밥도 못 먹고 잠을 설친다. 도대체 누구를, 왜, 어떻게 도우라는 것인가? 신은 자신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그래서 치과의사는 랍비 나흐트너를 찾아와 글자들의'의미'를 묻는다.


그런데, 이야기가 바로 이 대목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랍비 나흐트너는 딴청을 피우기 시작한다. 글자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 래리가 해답을 재촉하자, 그제야 못 이기는 척 심드렁한 어조로 랍비는 대답한다. 그게 뭐 중요하냐고. 글자의 의미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지만 남을 돕는 게 나쁠 건 없지 않냐고. 이어서 말하기를, 래리의 곤경에 신의 '뜻' 같은 것은 없다고. 만일 그런 것이 있다 한들 우리는 결코 그게 뭔지 알 수 없다고. 그냥 잘 먹고 잘 자는 것이 중요하다고.




원하는 해답을 찾지 못했다고 느낀 래리는 드디어 유대인 공동체에서 큰 존경을 받는 랍비 마샥을 찾아간다. 한데 그는 바쁘다는 핑계로 아예 래리를 만나주지도 않는다. 사실 마샥은 성인들은 만나지 않고, 오직 아이들을 면담하기로 방침을 정해놓은 참이었다. 마샥이 상담을 하는 장면은 영화 후반부에 살짝 등장한다. 성년식을 마친 래리의 아들과 만나는 장면이다.


어두운 서재 깊숙한 곳에 랍비가 웅크린 채 앉아 있다. 소년은 쭈뼛거리며 다가간다. 랍비는 노쇠한 목소리로 소년에게 묻는다.

진실이 거짓으로 밝혀지고 모든 희망이 사라져버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슨 깊은 비의를 담은 종교적 잠언인가? 토라의 한 구절인가? 그런데 래리의 아들은 뭔가 알아들은 듯한 표정으로 미소를 띠고 있다. 저 말은 사실, 사고뭉치 소년이 수업시간에 압수당한 카세트테이프에서 돌아가던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노래 <Somebody to Love>의 가사였다. 마샥은 소년에게 카세트를 돌려주면 짧은 덕담을 하나 던진다. "착하게 살아라, 얘야."




<시리어스 맨>의 주인공은 래리가 아니라 문제들이다. 서사의 주권은 문제들에게 양도되어 있다. 문제가 인간을 휘감고, 삼키고, 그의 행로를 결정하고, 그에게 의미를 묻게 하고, 그를 미궁에 빠뜨리거나 거꾸러뜨리거나 성장시킨다. 영화가 그리는 문제들은 생물처럼 역동적이고 복잡하여 예측할 수 없다. 특정 문제는 다른 문제와 연결되어 증식, 공생, 소멸한다. 인간은 문제들이 이루는 생태계의 한 구성 요소에 불과하다. 문제라는 것의 정체는 심지어 양자역학에 정통한 물리학자도 파악하지 못한다.


왜 나에게 이런 문제가 발생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도, 의미도 딱히 없다.

문제 스스로 소멸할 때까지 겪어내는 수밖에는 없다.




실제로, 래리의 문제들은 거의 저절로 풀려나간다. 아내와 연애하던 친구는 교통사고로 절명한다. 노심초사하던 정년 보장 심사는 잘 해결됐고, 아들도 성년식을 치뤘다. 사고를 친 동생의 변호사 비용은 한국인 유학생이 던져 놓고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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