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선은 악에 대한 반작용이다.
악은 자신에 대한 반작용을 통해 활로를 이어가기도 한다.
악과의 아무런 연관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선이 참된 선이다.
악의 반동이 아닌, 선 그 자체로 존립할 수 있는 선.
선과 악이 은밀히 교환되거나, 선과 악이 은밀히 소통할 때, 그 교환과 소통은 그 자체로 악이다.
이 교환과 소통을 묵인하는 것을 지혜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악은 선을 악으로 통합시키는 운동성이다.
그 운동성을 정지시키는 것이 참된 선이다.
선은 사고의 대상이 아니다. 실천의 대상도 아니다.
선은 많은 경우 사고와 실천의 정지 상태다.
뭔가를 할 때 우리는 선하기 어렵다. 하지만, 뭔가를 멈출 때,
멈춤 속에서 자기 자신이 희박해지고, 희미해지고, 연기처럼 소멸될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선에 동참하게 된다.
참된 집중을 할 때마다 우리 안의 악이 파괴된다.
선 앞에 섰을 때, 우리는 문자 그대로, 파괴된다.
우리가 느껴본 적 없는 마음의 깊이까지 선은 자신의 빛을 던진다.
그 빛에 노출된 모든 인간적인 것, 자아의 외피를 이루는 껍데기는,
햇빛을 받은 곰팡이처럼, 모두 녹아 사라진다.
우리는 선의 빛이 내려 쪼임으로써 비로소 자신 안에 존재하던 어둠의 깊이를 깨달을 수 있다.
악은 선이 우리의 내부로 파고 들어오는 그 깊이까지 결코 침투하지 못한다.
선이 파고 들어간 그 영혼은 곧바로 해체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부활한 다른 인간이 나타난다.
선은 악이 결코 행할 수 없는 존재의 완전한 파괴와 부활을 일으킨다. 선보다 더 강한 것은 없다.
가장 무시무시한 힘은 악이 아니라 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