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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 2: Innocence
은둔지Memo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 2: Innoc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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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기계
2025.04.15조회수 1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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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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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지

제 낯짝이 일그러져 있는데 거울을 탓해서 무엇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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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은 깨닫는 도구가 아니라 착각의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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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은 힐끗 볼 물건이지 오래 볼 물건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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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로봇은 달라. 하지만 '백은 흑이 아니다'라는 구별처럼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라는 식의 단순한 인식일 뿐이야. 공업용 로봇은 제외하더라도, 적어도 애완용 로봇이나 가이노이드는 공리주의나 실용주의와는 관계없는 존재지. 왜 그들이 인간의 형상을, 그것도 인체의 이상향을 모방해서 만들어져야 했을까? 인간은 왜 이토록 닮은 꼴을 만들고 싶어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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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인간이라는 규범에서 벗어난 존재야. 확립된 자아를 가지고, 자유의지에 의해 행동하는 걸 인간이라고 한다면 말이지. 그렇다면 인간의 전단계로서 카오스 속에 살아가는 아이들은 대체 뭘까? 명백히 내면은 인간과 다르지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어. 여자 아이가 소꿉놀이에 쓰는 인형은 실제 아기의 대체물이 아니야. 여자 아이는 육아 연습을 하는 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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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의 영성

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선은 악에 대한 반작용이다. 악은 자신에 대한 반작용을 통해 활로를 이어가기도 한다. 악과의 아무런 연관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선이 참된 선이다. 악의 반동이 아닌, 선 그 자체로 존립할 수 있는 선. 선과 악이 은밀히 교환되거나, 선과 악이 은밀히 소통할 때, 그 교환과 소통은 그 자체로 악이다. 이 교환과 소통을 묵인하는 것을 지혜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악은 선을 악으로 통합시키는 운동성이다. 그 운동성을 정지시키는 것이 참된 선이다. 선은 사고의 대상이 아니다. 실천의 대상도 아니다. 선은 많은 경우 사고와 실천의 정지 상태다. 뭔가를 할 때 우리는 선하기 어렵다. 하지만, 뭔가를 멈출 때, 멈춤 속에서 자기 자신이 희박해지고, 희미해지고, 연기처럼 소멸될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선에 동참하게 된다. 참된 집중을 할 때마다 우리 안의 악이 파괴된다. 선 앞에 섰을 때, 우리는 문자 그대로, 파괴된다. 우리가 느껴본 적 없는 마음의 깊이까지 선은 자신의 빛을 던진다. 그 빛에 노출된 모든 인간적인 것, 자아의 외피를 이루는 껍데기는, 햇빛을 받은 곰팡이처럼, 모두 녹아 사라진다. 우리는 선의 빛이 내려 쪼임으로써 비로소 자신 안에 존재하던 어둠의 깊이를 깨달을 수 있다. 악은 선이 우리의 내부로 파고 들어오는 그 깊이까지 결코 침투하지 못한다. 선이 파고 들어간 그 영혼은 곧바로 해체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부활한 다른 인간이 나타난다. 선은 악이 결코 행할 수 없는 존재의 완전한 파괴와 부활을 일으킨다. 선보다 더 강한 것은 없다. 가장 무시무시한 힘은 악이 아니라 선이다.
Memo
2025. 04.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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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의 영성 - 코엔 형제와 아키 카우리스마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무덤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 존재의 마음속 깊은 곳엔, 그가 보고 겪고 고통당한 모든 피해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에게 악이 아니라 선을 행하기를 굴하지 않고 기다리는 무엇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서 성스러운 건 다른 어떤 게 아니라 바로 이것입니다. 코엔 형제의 <시리어스 맨>(2010)은 1960년대 미국의 한 유대인 공동체에 사는 물리학 교수의 이야기다. 래리 고프닉. 칠판 가득 수학 방정식을 풀어가며 양자역학을 강의하는 그는 선량하고 평범한 중년 남자다. 제목이 알려주듯, 무척 진지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평온해 보이던 그의 일상이 갑자기 닥쳐온 문제들에 의해 흔들리기 시작하고, 그는 랍비들을 찾아간다. 첫번째 만난 주니어 랍비 스콧은 래리의 이야기를 듣더니, 대뜸 세상을 보는 시각을 바꾸라고 조언한다. 래리는 항변한다. 자신이 비뚤어진 게 아니라 지금 너무나 황당한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고 있지 않느냐고. 랍비는 그게 인생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러고는 뜬금없이 사무실 밖의 주차장을 바라보라 권한다. 차들이 드문드문 오가는 저 평범한 주차장에도 신이 있다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섭리로 가득하다고. 시각을 바꾸면 세상의 섭리를 깨닫게 된다고. 래리는 내심 저 젊은 랍비가 아직 인생 경험이 없어 저렇게 원론적인 조언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두번째로 만난 랍비 나흐트너는 좀더 고수다. 그는 예전에 상담을 했던 한 치과의사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의사는 우연히 환자 앞니 안쪽에서 이상한 글자를 발견했다고 한다.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라는 히브리어 단어들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놀란 치과의사는 고민에 빠진다. 밥도 못 먹고 잠을 설친다. 도대체 누구를, 왜, 어떻게 도우라는 것인가? 신은 자신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그래서 치과의사는 랍비 나흐트너를 찾아와 글자들의'의미'를 묻는다. 그런데, 이야기가 바로 이 대목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랍비 나흐트너는 딴청을 피우기 시작한다. 글자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 래리가 해답을 재촉하자, 그제야 못 이기는 척 심드렁한 어조로 랍비는 대답한다. 그게 뭐 중요하냐고. 글자의 의미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지만 남을 돕는 게 나쁠 건 없지 않냐고. 이어서 말하기를, 래리의 곤경에 신의 '뜻' 같은 것은 없다고. 만일 그런 것이 있다 한들 우리는 결코 그게 뭔지 알 수 없다고. 그냥 잘 먹고 잘 자는 것이 중요하다고. 원하는 해답을 찾지 못했다고 느낀 래리는 드디어 유대인 공동체에서 큰 존경을 받는 랍비 마샥을 찾아간다. 한데 그는 바쁘다는 핑계로 아예 래리를 만나주지도 않는다. 사실 마샥은 성인들은 만나지 않고, 오직 아이들을 면담하기로 방침을 정해놓은 참이었다. 마샥이 상담을 하는 장면은 영화 후반부에 살짝 등장한다. 성년식을 마친 래리의 아들과 만나는 장면이다. 어두운 서재 깊숙한 곳에 랍비가 웅크린 채 앉아 있다. 소년은 쭈뼛거리며 다가간다. 랍비는 노쇠한 목소리로 소년에게 묻는다. 진실이 거짓으로 밝혀지고 모든 희망이 사라져버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슨 깊은 비의를 담은 종교적 잠언인가? 토라의 한 구절인가? 그런데 래리의 아들은 뭔가 알아들은 듯한 표정으로 미소를 띠고 있다. 저 말은 사실, 사고뭉치 소년이 수업시간에 압수당한 카세트테이프에서 돌아가던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노래 <Somebody to Love>의 가사였다. 마샥은 소년에게 카세트를 돌려주면 짧은 덕담을 하나 던진다. "착하게 살아라, 얘야." <시리어스 맨>의 주인공은 래리가 아니라 문제들이다. 서사의 주권은 문제들에게 양도되어 있다. 문제가 인간을 휘감고, 삼키고, 그의 행로를 결정하고, 그에게 의미를 묻게 하고, 그를 미궁에 빠뜨리거나 거꾸러뜨리거나 성장시킨다. 영화가 그리는 문제들은 생물처럼 역동적이고 복잡하여 예측할 수 없다. 특정 문제는 다른 문제와 연결되어 증식, 공생, 소멸한다. 인간은 문제들이 이루는 생태계의 한 구성 요소에 불과하다. 문제라는 것의 정체는 심지어 양자역학에 정통한 물리학자도 파악하지 못한다. 왜 나에게 이런 문제가 발생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도, 의미도 딱히 없다. 문제 스스로 소멸할 때까지 겪어내는 수밖에는 없다. 실제로, 래리의 문제들은 거의 저절로 풀려나간다. 아내와 연애하던 친구는 교통사고로 절명한다. 노심초사하던 정년 보장 심사는 잘 ...
Memo
2025. 04.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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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 없는 희망 - 켈리 레이카트

우리가 희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희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켈리 레이카트는 미국 독립 영화계의 독보적 감독이다. 항상 재정 압박을 받으면서도 작가적 주권을 포기하거나 상업적인 타협을 한 적이 없는 레이카트는 오직 "외부의 간섭 없이 예술을 창조하는 것"을 꿈꿨다. 그 결과 메인스트림 상업 영화와 명확한 대립각을 이루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영화 세계를 창조하는 데 성공한다. 그의 영화는 주로 21세기 미국 민중의 불안정한 삶을 그린다. 이런 점에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를 연상시키도 한다. 하지만 네오리얼리즘 특유의 인간적 온기와 낙관성은 레이카트 영화에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대신 거기서 우리는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차가운 세계를 살아가는 피폐하고, 빈곤하고, 고통에 짓눌린 자들의 마비된 불행을 본다. 영화의 주된 배경인 북서부 풍경도 황량하고 황폐하고 쇠락해 있다. 도시건 사막이건 숲이건, 낙후와 조락의 분위기는 일관적이다. 느린 카메라가 보여주는 이 어두운 리얼리티는 '사회적' 파괴상과 '생태적' 파괴상의 중첩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회와 자연이 동시에 해체되는 느리고 고요한 파국. 이것이 레이카트 영화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세계의 얼굴이다. 레이카트의 스타일은 흔히 "느린 보폭의 리얼리즘"이라 불린다. 사실, 그의 영화에는 특별한 사건이나 스펙터클, 극적 전개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관조적이고 섬세하고 미니멀하다. 대화는 나직이 중얼거려진다. 롱테이크가 자주 사용되고 스토리텔링도 친절하지 않다. 인물의 본성이나 이력도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 속 많은 장면에서 우리는 "고요, 공백, 텅 빔, 침묵"을 접한다. 그에게 느림은 단순한 미학적 효과나 아방가르드적 실험의 의미를 넘어서, "영화가 아니었다면 놓쳤을 사물들과 사람들을 보게"하는 가시화 장치로 기능한다. 가속이 규범이 된 세계에서 느린 영화는 속도와 변화에 의해 주변으로 밀려난 채 소외된 풍경과 인간의 진실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레이카트 영화가 가시화하는 두 대표적 대상은 세계의 '파국'과 거기 떠도는 인물의 '불행'이다. 파국은 주로 '집(eco)'의 소실, 파괴, 해체의 형태를 띤다. 여기서 집은 인물들의 실제 가정을 의미할 수도 있고, 경제의 에코나 생테의 에코를 가리킬 수도 있다. 어떤 형태건 간에 레이카트의 세계는 성장하고 진보하는 대신 붕괴하는 세계다. 경제적으로 쇠락하고 생태적으로 파괴된 세계. 이러한 에코의 결손은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을 항시적 이동 상태로 몰아넣는다. 그들은 빈곤하고, 불안정하며, 길 위에 있다. 허망한 도주선들이 영화를 이리저리 가로지른다. 인물들의 불행은 이 존재론적 불안정성에서 온다. 영화의 배경이 된 소도시에는 지진, 폭동, 테러, 전쟁처럼 흔히 파국이라는 용어로 상상되는 그런 사건들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굳이 찾아보자면 차가 고장 난 것, 사료를 훔치려다 유치장에 갇혔다가 풀려난 것, 강아지 루시가 잠시 실종된 것이 사건의 전부다. 앙드레 바쟁이 비토리오 데시카의 <자전거 도둑>(1948)에 대해 썼던 한 논편을 빌려 말하자면, 이 영화에는 "신문 사회면 기사의 재료조차도 없다." 하지만 도시 이곳저곳을 배회하는 주인공 웬디를 카메라가 따라갈 때, 마치 음화에 찍힌 이미지들이 인화액에 반응하며 드러나듯, 도시의 실질적 사회 상태들이 가시화된다. 거기에는 국가도 사회도 커뮤니티도 없다. 경찰서의 지문 기계는 고장 났고, 차량 정비소도, 실종 동물 보호소도 닫혀 있다. 황량한 거리에는 쓰레기들 주워 파는 자들이 배회한다. 도시를 공적 공간으로 만들어주는 원리에 손상이 가해진 듯하고 해체의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 파국은 사건이 아닌 과정으로, 예외가 아닌 정상 상태로, 자각되는 사실이 아닌 일종의 무드처럼 도시 전체에 분자적으로 스며 있다. 웬디에게 남은 것은 자신의 몸뚱이 하나와 그가 종종 흥얼거리는, 기원을 알 수 없는 평범한 멜로디 하나뿐이다. 이 흥얼거림은 웬디의 남루한 실존의 경계를 희미하게 표시한다. 하지만 웬디는 언젠가 저 최후의 소유물마저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웬디의 모든 여정은 삭감과 소멸과 사라짐을 향한 이동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웬디는 그저 빈곤한 자, 박탈된 자, 고통스러운 자가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충분치 않아 보인다. 그 이상의 뭔가가 웬디에게 새겨져...
Memo
2025. 0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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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 스스로 말하게 하라

초창기부터 영화는 사회정치적 삶에서 주변화되고 망각된 민중의 삶을 카메라에 담아왔다. 에이젠슈테인의 혁명 군중, 도브젠코의 우크라이나 농부들, 채플린과 버스터 키튼이 극화한 미국 하층 계급 노동자들과 도시 빈민, 미조구치 겐지의 여성들, 비토리오 데시카, 로셀리니가 그린 이탈리아 민중의 얼굴들. 민중의 의복과 음식, 집과 노동 현장, 머리칼과 피부, 더듬거리는 언어, 지배자들과의 대립과 투쟁. 이 모든 민중적 생명의 세부들이 영화의 등장과 더불어 사회의 집합 기억에 등록되기 시작했다. 이때, 인민의 얼굴은 영화적 진리가 서리는 특권적 장소가 된다. 파솔리니의 <마태복음>(1964)은 예수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민중에 대한 영화가 아닌가? 도입부에 나오는, 반항적인 듯하면서 수수께끼 같은 어린 마리아의 표정. 고난에 깎이고 피로에 부식되었지만 형형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쏘아보는 히브리 민중들. 파솔리니가 그린 예수, 그의 언어, 그의 진리는 정작 인민의 저 강렬한 얼굴 앞에서 범상해 보이기까지 한다. 감독의 카메라가 민중의 아픔을 치유하려는 듯, 이해하려는 듯, 사랑과 경의를 품고, 그들의 얼굴을 어루어만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신학은 언제나 민중신학이다. 거친 자연 풍광을 스크린의 실질적 주인공으로 끌어들이는 경향은 사실 중국의 5세대 감독들에게 공통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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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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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 스스로 말하게 하라 - 지아장커

아직 존재하지 않는 인민에게 호소하지 않는 예술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 영화가 인민을 집중적으로 표상하기 시작한 것은 제5세대 감독인 천카이거, 텐좡좡, 장이머우부터다. 대개 베이징 영화학교 78학번인 이들은 0년대 초에 대거 등장, 90년대 중반까지 중국 영화의 세계적 선풍을 주도했다. 특히, 천카이거가 감독하고 장이머우가 촬영한 <황토지>는 이들의 영화적 이념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하는 대표작이다. 영화의 메시지는 선명하다. 사회주의적 근대와 낙후된 봉건 세계가 직각으로 대립하고 있다. 희망은 남쪽에 있고, 농민들은 폐습에서 구제되어야 한다. 양자를 매개하는 것은 팔로군 병사다. 그런데, 이런 사상적 자명성을 교란하는 한 요소가 시종일관 스크린을 지배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황무, 황토의 풍경이다. 장이머우의 카메라는 척박한 북방 고원을 원경에서 집요하게 비춘다. 거기 펼쳐지는 것은 인간 생존을 가능하게 하기보다 오히려 저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듯 보이는 누런 불모의 땅이다. 융기해 있는 자갈밭, 탁류로 흐르는 거친 황하, 침식되어 깎여나간 비탈들, 파도치듯 지평선까지 뻗어 있는 구릉들, 외롭게 서 있는 나무. 단순한 배경이라기에는 너무나 압도적으로 이 풍경들은 화면에 군림한다. 영화가 밀고 가는 계몽 서사는 이 풍경의 압력에 의해 배반되고, 비틀리고, 굴절된다. 자연은 역사의 파란만장한 변화(봉건제, 사회주의, 자본주의)에도 꿋꿋이 버티는 장기 지속의 시간을 웅변한다. 계몽의 이야기를 크게 외치는 저 영화는 마치 복화술로 말하듯이 은밀하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이다. 중국이란 무엇인가? 인민이다. 인민이란 무엇인가? 황토다. 대지다. 자연과 동맹을 맺고 역사를 우회하는 장구한 리듬이다. 무참하게 긴 시간이다. 우리는 여기서 <황토지>의 분열선을 발견한다. 몽매한 인습의 담지자로 인민을 보는 시각은 그들의 얼굴을 응시하는 카메라에 의해 부정된다. 내가 보기에 승리하는 것은 카메라다. 세파에 찌들고 노동에 조로한 인민의 얼굴은 누추하지만, 동시에 거센 자연을 닮은 완강한 존재감을 발산한다. 인민과 자연은 닮아 있다. '사회-역사적' 주체를 넘어서는 '생태-지질학적' 주체로서의 인민. 타자의 얼굴을 보면서 그를 죽일 수 없다는 레비나스처럼 말해보자면, 인민의 얼굴을 보면서 그를 계몽할 수는 없다. 인민의 얼굴은 계몽자를 도리어 계몽하기 때문이다. 인민의 얼굴에는 누대에 걸쳐 축적된 고난과 고초와 비굴과 분노와 야합과 저항이 퇴적층처럼 켜켜이 집적되어 있다. 그것은 이념과 사상을 초월하는 착잡한 아우라를 내뿜는다. <황토지>의 마지막 장면은 이런 점에서 자못 징후적이다. 이야기인즉, 옌안으로 떠났던 팔로군 병사는 마을로 돌아온다. 자신이 기거하던 집을 찾아가지만, 그곳은 텅 비어 있다. 기우제가 시작된 것이다. 용머리 성물이 세워져 있고, 그 아래 엎드린 주민들은 모두 웃통을 벗은 채, 머리에 풀을 엮어 만든 관을 쓰고 의례를 행한다. 인민은 개체가 아니라 집단적 신체를 이루고 있다. 종동의 흐름이다. 비가 내리지 않는 하늘을 바라보며 트랜스에 가까운 열광 상태에 빠진 이들은 필사적으로 기도하고, 울부짖고, 탄원한다. 맑은 하늘에는 어떤 변화도 없다. 말라가는 못에서 기포가 솟아오른다. 좌절이 이들을 짓누른다. 그런데 이때,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돌발적 상황이 발생한다. 침묵 속에서 무언가 기다리던 군중이 갑자기 성물을 뽑아 들고 고함을 지르며 어디론가 몰려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영화는 별다른 해명을 제시하지 않는다. 저것은 의례의 한 절차인가? 기도에 미동조차 않는 하늘에 대한 분노의 폭발인가? 우발적 히스테리인가? 사제 권력을 부정하는 봉기인가? 관객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힌트는 팔로군 병사의 등장이다. 기우제 군중이 질주하는 것과 동시에 팔로군 병사가 언던을 넘어온다. 그러다면 군중은 마을로 돌아온 계몽적 주체와 사회주의 이념을 향해 열광적으로 달려가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군중은 병사의 출현을 인지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에게 등을 보이며, 그와 반대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다. 오직 한 사람만이 그의 귀환을 알아보고 병사를 향해 방향을 바꾼다. 마을을 떠난 소녀의 동생 한한이다. 소년은 군중의 흐름을 ...
Memo
2025. 0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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