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틀림’을 느끼지 않고 있다는 것은 주관적으로는 깔끔하다는 것이다. ‘뒤틀림’은 한 명의 인간이 모순을 안고 있기 때문에 비틀어지는 것이지 모순과 대립이 두 사람 사이에서 분할되면 거기에는 ‘확실히/선명히/깔끔하게’ 대치하는 두 명이 인간이 있는 것이 되어서 내적인 ‘뒤틀림’은 소멸한다. 간단한 산술이다. 이것이 전후 일본이 채용한 ‘뒤틀림’의 처리 방법이다. 대립하는 두 가지 이데올로기, 두 가지 당파의 모순 안에 모든 것을 집어넣으면 되는 것이다.
미국에 대한 감정이 애매모호하다고 하면 ‘친미파’와 ‘반미파’ 두 가지 입장을 준비해두고 그 사이에서 싸우게 한다. 헌법에 대한 입장이 결정되지 않는다고 하면 ‘호헌파’와 ‘개헌파’로 논쟁을 붙인다. 침략 행위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면 ‘아시아 인민에 대한 사죄’를 연호하는 ‘지식인’과 ‘망언’을 반복하는 관료로 끝이 없는 ‘두 명을 무대에 세우는 연극’을 하게 한다.
이 양당파의 절묘한 ‘분업’에 의해서 일본은 자기모순으로부터도, 죄책감으로부터도 자기면죄를 받고 게다가 주체적으로 판단하는 것도 행동도 하지 못한 채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반세기를 흘려보냈다. 그 결과 가토에 의하면 일본인은 일종의 ‘저능’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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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트르트는 모리악, 메를로 퐁티, 카뮈와 같은 논적들의 ‘어법’에 시비를 걸어서 그들을 계속해서 실어증으로 몰아넣었다. 데리다도 천재적인 논쟁가이다. 이 수법을 숙지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 ‘사람의 어법에 숨어 있는 자기 부인 구조의 폭로’라는 전략 그 자체를 하나의 ‘체계’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아주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이 70년대 이후 인문과학의 세계에서 ‘최강의 논쟁용 무기’가 된 탈구축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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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음'은 전면적인 부정에 의해 조금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