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아내의 사촌 동생이 집에 놀러와 긴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동생은 명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다가 최근 처우가 좋은 금융기관에 취업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알렸다. 가족 모두가 축하하는 분위기 속에서 나 역시 기쁜 마음으로 저녁을 샀다. 그리고 개인 자산 관리에 관심이 많은 나는 사회초년생이 된 동생에게 자연스레 조언을 건넸다.
"이제 취직도 했으니 연금 계좌도 만들고, 우량한 주식도 조금씩 모아가야지?"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동생은 고개를 저으며 주식 투자는 하지 않겠다고 했다. 대학 시절, 호기심에 투자를 시작했다가 팬데믹 시국의 폭락장을 겪은 뒤, 시장에 대한 깊은 공포가 생겼다는 것이다. 언제 반토막이 날지 모르는 자산에 힘들게 번 돈을 넣는 것이 망설여진다고 했다.
나는 잠시 의아했다. 동생은 회계와 재무관리는 물론, 거시경제 지식까지 풍부한 전문가다. 나에게 주식이란 곧 '기업의 소유권'이고, 회사의 재무 건전성을 진단하는 능력이야말로 좋은 주식을 고르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훌륭한 분석 도구를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투자를 두려워한다니, 못내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경우는 비일비재했던 것 같다. 금융기관에 다닌다고 해서 모두가 탁월한 투자자인 것은 아니더라. 심지어 투자에 관한 박사 학위가 있어도 개인 자산 관리는 엉망인 경우도 많다. 이는 마치 의사라고 해서 모두가 건강 관리에 철저하지 않고, 경찰관이라고 해서 보이스피싱에 면역이 아닌 것과 같다.
왜 이런 괴리가 생길까? 어쩌면 '지식'의 영역과 '믿음'의 영역이 다르기 때문일지 모른다. 나 역시 어린 시절부터 금융업에 종사하셨던 부모님께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말이 있다. "주식이 공부해서 되는 거라면, 경제학자나 투자론 교수는 다 재벌이 됐게?" 주식은 위험천만한 도박판이고, 개인이 공부로 이길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그 말씀은 꽤나 설득력 있게 들렸다. 그래서 나 또한 오랫동안 주식이라는 자산을 외면한 채, 열심히 저축하고 부동산 같은 실물 자산에 집중하는 전통적인 재테크에만 몰두했었다.
하지만 우연한 계기로 금융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면서, 나는 뒤늦게 주식과 사랑에 빠졌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유튜브를 탐닉하며 깨달은 것은, 주식 투자의 본질이 차트 위에서 춤추는 숫자를 맞히는 게임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주식의 본질이 기업이란 걸 알게 된 나는 기업을 발굴하고 분석하는 과정 자체를 즐기게 되었다. 내가 주식을 살 때, 나는 데이터 쪼가리가 아니라 그 기업의 비즈니스 모델과 미래를 산 기분이 들었다.
재무상담을 하다 보니 이제는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은 알게 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식을 '기업의 소유권'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은 주식을 매순간 변동하는 '숫자 그 자체'로 바라본다. 그렇기에 아무리 회계 지식이 뛰어나도, 눈앞에서 요동치는 빨간색과 파란색 숫자의 공포를 이겨내지 못하는 것이다.
이 현상을 설명하기에 벤자민 그레이엄의 통찰만큼 정확한 것은 없다. "주식 시장은 단기적으로 보면 인기투표 기계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체중계다." 사람들은 주식을 기업의 체중이 아니라, 그날 그날의 인기를 사고파는 티켓으로 여긴다.
이 두 가지 관점, 즉 '기업의 소유권'과 '욕망의 교환재'라는 시각 차이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우리는 어쩌다 기업이라는 실재(Real)를 보지 않고, 숫자라는 환상(Image)에 매몰되게 되었을까? 이 기묘한 분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계를 돌려 주식이 처음 탄생했던 그 순간의 역사를 되짚어 봐야 한다. 그곳에 우리가 잃어버린 '원본'이 있다.
주식의 시뮬라시옹
주식회사의 기원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무역이 큰 돈이 되자, 사람들은 너도 나도 배를 띄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배를 사는 것에는 큰 자본이 들었다. 배에 투자하고 싶었지만 배를 살 수 없었던 사람들은 획기적인 생각을 해냈다. 투자자들은 가능한 만큼만 각출하여 배를 사고, 선장과 선원을 고용했다. 그리고 무역의 성과를 공유했다. 그 결과 작은 자본으로도 큰 사업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 효율화에 대한 열망이 주식이란 발명품을 만들어 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더 근원적인 인간의 욕망에서 주식의 기원을 끌어내고 싶다. 그것은 '불확실한 운명을 통제하고 싶은 욕망'이다. 사람들은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한다. 알 수 없는 미래와 현상을 통제하고 싶은 마음은 발명의 가장 강력한 욕망이기도 하다. 미래의 시간을 통제하기 위해 채권을 만들었고, 사업의 불확실성을 통제하고 싶어 주식을 만들었다.
당시 인도로의 항해는 말 그대로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배 한 척을 띄우는 데는 막대한 자금이 들었지만, 그 배가 향신료를 가득 싣고 무사히 돌아올 확률은 희박했다. 폭풍우, 해적, 괴혈병이 도사리는 바다에서 배가 침몰하면 선주는 하루아침에 전 재산을 날리고 길거리 나앉게 된다. 하지만 성공하기만 하면? 그 수익은 상상을 초월했다. 소위 '대박'이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수리적 딜레마가 발생한다. 가령 어떤 항해의 성공 확률이 20%이고, 성공 시 수익이 투자금의 10배라고 가정해보자. 실패 시는 전액 손실이다. 이 게임의 기대값은 [0.2*10 + 0.8*0=2]으로 명백히 양수(+)다. 수학적으로는 무조건 해야 하는 게임이다. 하지만 80%의 확률로 '파산'이라는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면, 아무리 기대값이 높아도 전 재산을 '올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인간에게 파산은 곧 죽음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때 인류는 천재적인 발명을 해낸다. "혼자서 배 한 척을 다 사지 말고, 10명이 돈을 모아 배 10척에 나누어 싣자!"
이것이 주식의 근본적 욕망이다. 내 돈을 쪼개어 여러 배에 분산함으로써, 10%라는 낮은 성공 확률을 여러 번 시행하여 통계적 기대값으로 수렴시키려는 시도. 즉, 주식은 신의 영역인 '운'을 인간의 영역인 '대수의 법칙으로 끌어내리기 위해 고안된 시스템이었다. 사람들은 이 증서를 손에 쥐고 안도했다. 이제 바다는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계산 가능한 수학의 영역이 된 것이다.
초기의 주식은 이처럼 철저히 '사업의 리스크와 과실을 공유하는 시스템'이었다. 주식의 권리는 곧 바다 위를 항해하는 배의 일부였고, 투자자의 운명은 배의 항해 일지와 정확히 일치했다. 이것이 '실재(Real)'의 세계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예기치 못한 변화가 일어났다. 항해가 길어지자 당장 현금이 급한 사람들이 생겨났다. "내 배는 아직 인도양을 지나고 있는데, 당장 딸의 결혼 자금이 필요해." 사람들은 커피숍에 모여 자신이 가진 소유권을 남에게 팔기 시작했다. 주식에 '거래가능한 상품'이라는 개념이 더해진 순간이다.
그리고 이 유동성은 주식의 성격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전까지 주식은 '배가 돌아와야만' 가치가 있는 종이였다. 하지만 거래가 시작되자, 배가 돌아오지 않아도, 심지어 배가 어디 있는지 몰라도 주식 증권은 그 자체로 돈이 되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이제 수평선 너머의 '배'에서 커피숍 테이블 위의 '종이'로 옮겨갔다.
"저 배가 정말 향신료를 가져올까?"라는 질문보다 "이 종이를 내일 더 비싸게 사줄 사람이 있을까?"라는 질문이 더 중요해졌다. 기업의 본질적 가치와는 별개로, 사람들의 기대와 공포, 그리고 욕망이 뒤섞여 새로운 가격, 즉 프리미엄이 생겨난 것이다.

이것은 혁명이었지만, 동시에 거대한 착시의 서막이었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예견한 '시뮬라크르(Simulacre)'의 세계가 열린 것이다. 시뮬라크르란 원본이 없는 이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