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4월, 포틀랜드의 아버지와 아들. 손에는 총, 옆에는 팻말. "가스 도둑 조심해. 우린 준비됐어."
석유 한 방울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지구 반대편 사막에서 내린 결정이, 이 가족의 차고까지 전쟁이 번져왔다.
50년이 지났지만, 전쟁은 여전히 다른 길로 전해진다. 출처: David Falconer / U.S. National Archives (Public Domain)

종량제봉투가 없다.
전국 마트와 편의점에서 종량제봉투가 사라지고 있다. 나프타 수급이 막혔다.
나프타가 없으면 폴리에틸렌이 없고, 폴리에틸렌이 없으면 봉투가 없다.
호르무즈 해협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오늘 내 쓰레기봉투 문제가 됐다.
추상적 지정학이 생활 트라우마가 되는 순간이다.
이런 순간이 쌓일수록 사람들의 행동이 바뀐다. 행동이 바뀌면 정치적 합의가 바뀐다.
정치적 합의가 바뀌면 인프라가 바뀐다. 인프라가 바뀌면 돌아갈 수 없다.
직관적으로는 맞는 말처럼 들린다. 근데 정말 그럴까.
트라우마는 정말 에너지 전환을 가속하는가. 아니면 가장 빠른 해결책으로 달려가는가.
그 둘은 같은 말이 아니다.
1. 우리는 어디에 있나
2024년 기준, 전 세계 전력 생산의 구조는 여전히 화석연료가 지배하고 있다.
석탄 35%, 천연가스 22%, 석유 2%로 화석연료 합계가 약 59%다.
재생에너지는 수력 14%, 풍력 8%, 태양광 7%, 바이오에너지 3%로
합계 32%, 원자력 9%를 더한 클린에너지 전체가 41%에 달한다.

수치만 보면 전환이 한창 진행 중인 것처럼 보인다. 2024년은 하나의 역사적 이정표였다.
태양광과 풍력의 합산 발전량이 처음으로 수력을 추월했고,
클린에너지 전체가 전력 믹스의 40%를 넘은 건 1940년대 이후 처음이었다.
그러나 비중이 아닌 절대량을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전 세계 전력 수요는 매년 4% 안팎으로 증가하고 있다.
AI 데이터센터, 전기차, 히트펌프가 수요를 끌어올리고,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경제 성장이 이를 더욱 가파르게 만들고 있다. 파이가 커지는 속도가 클린에너지 성장 속도를 따라잡고 있기 때문에, 재생에너지 비중은 오르고 있지만 화석연료의 절대 발전량은 줄지 않고 있다.

이것이 에너지 전환의 본질적인 역설이다.
비중의 전쟁에서는 이기고 있지만, 절대량의 전쟁에서는 아직 승패가 갈리지 않았다.
단순히 화석연료 비중을 줄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절대 배출량 자체를 줄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2. 트라우마가 전환을 가속한다
에너지 전환, 공급망 지역화, 에너지 안보 내재화. 이번 위기 이전에도 다 가고 있던 방향이다.
이번이 그 방향을 꺾은 게 아니다.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게 만들고 있다는 주장이 있다.
논리는 이렇다. 공급 충격으로 생긴 트라우마는 인프라 투자로 이어진다.
인프라는 사라지지 않는다. 봉투가 없고, 나프타가 없고, LNG가 없는 경험이 쌓이면, 정치인들의 선택이 바뀌고,
기업들의 투자 기준이 바뀌고, 소비자들의 행동이 바뀐다.
그리고 데이터는 이 논리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2022년 러시아 침공 직후, EU는 REPowerEU를 발표하고 2030년 재생에너지 목표를 기존 40%에서 45%로 상향했다. 같은 해 미국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통과시키며 클린에너지에 역대 최대 규모인 약 3,690억 달러를 쏟아부었다. 안보 위기가 양대 경제권의 재생에너지 정책을 동시에 끌어올린 것이다.
애리조나주 플래그스태프. 출처: Purina employee /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시장은 정책보다 빠르게 반응했다.
2023년 전 세계 태양광 신규 설치량은 전년 대비 약 87% 급증했고,
2024년에도 사상 최고치를 다시 경신했다. 풍력도 함께 올랐다.
2024년 태양광·풍력 합산 발전량이 처음으로 수력을 추월한 건 앞에서 말한 대로다.
게다가 기술은 이미 임계점을 넘었다. 태양광 발전 단가는 2010년 이후 약 90% 하락했다.
학습 곡선이라고 불리는 자기강화적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
보급량이 늘면 생산 단가가 떨어지고, 단가가 떨어지면 보급이 더 늘고, 그러면 단가가 또 떨어진다.
역사상 에너지 전환은 항상 더 싸고 더 강한 것이 이겼다.
거기에 수요 측에서도 낙관론의 근거가 있다. 인도와 동남아시아 같은 개도국이 석탄·석유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재생에너지로 도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가 유선전화 없이 바로 스마트폰으로 넘어간 것처럼.
지금 트라우마가 이미 기울어진 판을 더 빠르게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다.
정책, 자본, 기술, 설치량. 네 방향에서 동시에 가속이 확인된다.
데이터만 보면 테제가 맞는 것 같다.
근데 세 가지 반론이 있다.
3. 트라우마는 가장 빠른 해결책으로 달려간다
1973년 10월, OPEC이 원유 수출을 금지했다. 배럴당 3달러였던 유가가 석 달 만에 12달러가 됐다.
선진국 전체가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세 나라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미국은 공급을 잡으려 했다. 1975년 전략비축유(SPR) 시스템을 만들었다. 에너지를 비축하면 다음번 충격을 버틸 수 있다는 논리였다. 에너지원을 바꾸는 게 아니라 기존 에너지원을 더 안전하게 확보하는 방향이었다.
프랑스는 에너지원 자체를 바꿨다. 1974년 메스메르 플랜을 발표하고 원전 대규모 건설에 착수했다. 1973년 2% 미만이었던 원자력 비중이 1984년 55%가 됐다. 11년 만에 구조가 바뀐 것이다. 단 그 방향이 재생에너지가 아니라 원자력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일본은 수요를 줄이는 쪽을 택했다. 에너지를 어디서 가져오느냐보다 얼마나 효율적으로 쓰느냐에 집중했다. 1973년부터 1985년 사이 일본의 GDP는 50% 성장했지만 에너지 소비는 거의 늘지 않았다. 에너지 집약도가 선진국 최저 수준이 된 것이 이 시기다.
같은 충격이었다. 같은 해에 왔다. 결과는 세 갈래였다.
트라우마는 에너지 의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방향만 만들었다. 그 방향을 실현하는 수단은 각자가 달랐다.
그리고 그 수단의 선택은 그 이후 수십 년의 에너지 구조를 고정시켰다.
프랑스가 오늘날까지 원전 중심 구조를 유지하는 것,
일본이 에너지 효율에서 독보적 위치에 있는 것,
미국이 비축유를 전략 무기로 쓰는 것 모두 1973년의 선택이 만든 결과다.
2022년 독일이 LNG를 택한 것은 실수가 아니었다.
공포가 지배하는 순간 민주주의 정부가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구조적 경로였다. 1973년에도 그랬다.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독일은 전체 에너지의 약 4분의 1을 러시아 가스에 의존하고 있었다. 공급이 끊겼다. 트라우마가 왔다. 그리고 독일이 선택한 건 재생에너지 전환 가속이 아니었다.
2023년 11월, 독일 빌헬름스하펜 앞바다. 두 번째 LNG 터미널 공사가 한창이다.
출처: Ein Dahmer /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녹색당 소속 경제·기후부장관 로베르트 하벡이 LNG 터미널 건설을 밀어붙였다.
기후정당 대표가 화석연료 인프라를 건설한 것이다. 그의 논리는 이러했다.
"우크라이나 공격이 엄청나게 많은 것을 바꿨다. 독일이 러시아 에너지에서 독립해야 한다."
LNG는 재생에너지로 가는 과도기적 브릿지 연료라는 것이었다.
속도는 전례 없었다. 첫 번째 LNG 터미널은 계약 체결 후 7개월 만에 완공됐다.
보통 5년 걸리는 인프라를 안보 공포가 7개월로 압축했다.
재정 보수파인 재무장관조차 즉시 30억 유로를 배정했다. 기후냐 안보냐 논쟁이 없었다.
"러시아에 대한 공포" 하나로 연립정부가 합의를 만들었다.
여기서 결정적인 문제가 생겼다. 독일은 카타르, 미국과 최소 15년짜리 장기 공급 계약이 체결했다.
2022년부터 2038년까지 LNG 인프라에 투자하는 비용은 약 98억 유로.
이미 연방의회가 예산을 확정했다.
환경단체 분석에 따르면 독일이 계획한 LNG 터미널 총 용량은 실제 필요량의 50% 이상을 초과한 수준이다.
기후 중립 목표를 달성하려면 독일의 가스 소비는 줄어야 하는데, 거기에 맞지 않는 과잉 투자가 이뤄진 것이다.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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