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사이드 프로젝트로 AI Awards에 낼 작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팀을 꾸려 컨셉을 잡는 데 몇 주째 매달리는 중인데, 역시 부딪히게 되는 벽은 기술이 아니라는 걸 느끼고 있습니다. 어떤 툴로 어떻게 만들지보다 오래 걸리는 건, 더 단순하고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
좋은 이야기는 대부분 시대와 공명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 어딘가를 건드리는 데가 있어야, 짧은 한 편도 가닿게 되죠. 그래서 이야기를 빌드하기 전에, 요즘 시대를 먼저 들여다보게 됐습니다. 지금은 대체 어떤 시대인가.
헤게모니 이론을 정립한 안토니오 그람시는 『옥중수고(Prison Notebooks)』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낡은 것은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을 때, 바로 이 공백기에 온갖 병리적 징후(괴물)들이 나타난다.
여러 채널을 살펴보면 AI를 앞에 두고 사람들의 입장은 크게 둘로 갈리는 것 같습니다.
한쪽은 두려움을 표현합니다. '이러다 내가 설 자리가 사라지는 건 아닐까.'
다른 한쪽은 뛰어들려고 합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뒤처지면 안된다라는 듯이, 새 툴이 나올때마다 누구보다 빨리 익히려 합니다.
정반대처럼 보이는 태도지만, 저는 둘이 같은 마음에서 기원한다고 생각합니다. 두려워하는 쪽도 뛰어드는 쪽도, 결국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AI가 우리를 어디까지 바꿀지, 그래서 끝내 무엇이 우리들의 몫으로 남을지 — 아무도 자신 있게 답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뿌리에 있는 질문은 하나로 보입니다. 무엇이 여전히 우리의 것일까?
솔직히, 이 질문을 받으면 제일 마음이 복잡한 사람이 저 일겁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이 대회에 나가는 우리 팀부터가, AI가 열어주는 새로운 가능성을 좇다보니 참여하고 있는거니까요. 경계하는 마음도 얼른 뛰어들어야 한다는 마음도 제 안에 같이 있습니다.
저는 지난 글에서 이 질문을 다룬 적이 있습니다. 도구가 돌에서 붓으로, 붓에서 키보드로, 이제 AI로 바뀌어 오는 동안에도 끝내 대체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고. 무엇을 왜 말할지 아는 사람, 이야기꾼이라고 말이죠. 도구에 묶인 사람은 도구와 함께 사라졌지만, 이야기꾼은 그대로 남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다 얼마 뒤, 누군가 그 글의 표현을 그대로 가져다 쓴 포스트를 우연히 보게 됐는데 — 제가 의도했던 것과는 묘하게 다른 이야기가 되어 있더라고요. 그걸 보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이야기꾼'이라는 답이 잘못된 건 아니지만, 아직 충분히 선명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누군가에겐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질 만큼 윤곽이 흐렸던 겁니다.
그래서 그 답을 조금 더 또렷하게 정의해보려다, 한 걸음 더 나가게 됐습니다.
기술의 등장이 사람의 일을 가져간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1839년, 다게르가 은판 위에 현실을 그대로 박아내는 기술을 공개했습니다. 그때 가장 크게 흔들린 건 화가들이었습니다. 그럴 만했죠. 수백 년 동안 화가의 가장 핵심적인 역할은 '눈앞의 것을 똑같이 옮기는 것'이었으니까요. 인물을, 풍경을, 사건을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남기는 사람. 그게 화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기계가 나타나더니 그 일을 더 빠르고 더 정확하게 해내기 시작한 겁니다. 당시 화가들의 심정이 어땠을지 짐작이 갑니다.
'똑같이 그리는 거라면 저 기계가 나보다 나은데, 그럼 나는 이제 뭘 하지..'
실제로 일감을 잃은 사람들도 무수했다고 합니다. 작은 초상화를 그려 생계를 잇던 화가들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사진관으로 향하면서 의뢰가 끊겼습니다.
그런데 이후의 이야기는, 큰 줄기에서 정반대로 흘러갔습니다.
화가들은 '똑같이 그리는 일'을 사진에 넘겨주고 나서야, 비로소 그 의무에서 풀려났습니다. 어차피 기계가 더 잘하는 일을 붙들고 경쟁할 이유가 없어진 거죠. 대신 그들은 사진이 못 하는 쪽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빛이 시시각각 바뀌는 찰나, 같은 풍경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느낌, 카메라에는 담기지 않는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 같은 것들이요.
그렇게 나온 것이 인상주의(Impressionism)였습니다.
모네가 같은 성당을 빛의 변화에 따라 수십 번 다시 그리고, 드가가 이전에는 전혀 다뤄지지 않던 무대 뒤 무용수의 모습을 조명했을 때 — 그건 현실의 복제가 아니라, 한 사람의 눈에 비친 세계였습니다. 흥미로운 건, 그들이 사진을 적으로만 여기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사진의 과감한 구도나 흐릿하게 번진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빌려오기도 했죠. 밀어내면서 동시에 끌어당긴 셈입니다.

쥘 들뢰즈는 모네의 '루앙 대성당' 을 예로 들어 'Repetition and difference(반복과 차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기도 함. 같은 대상을 수십 번 반복해 그리면서도 매번 다른 빛을 담아냄으로써 기계적 복제가 아닌 인간 시선의 고유한 차이를 증명했다는 것.. ㅇㅇ

드가는 무대 위 예술의 화려함이 아니라 그 뒤의 혹독한 과정과 생계 같은 현실을 조망했음.. ㅇㅇ
오히려 회화 안에 갇혀있던 '사람'을 드러냈습니다.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한 사람의 시선이라는 영역을 말이죠.
비슷한 일은 그 전에도 있었습니다. 산업혁명 당시 기계가 손의 노동을 대거 가져갔을 때,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손으로 만든 것'의 가치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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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있는 사유의 흐름, 잘 보고 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다 써두고도 '이게 과연 근거있는 투자의 첫걸음 커뮤니티에 적절한 글인가'싶어 업로드를 미뤘었슴다.
투자자란 결국 현상 너머의 '진짜 가치'를 찾아내야 하는 입장이니, 투자자의 고민과 충분히 맞닿아 있다는 결론을 내렸슴다. 작은 영감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음번에는 본래 목적에 맞게, 실전 투자에 밀착된 글을 써보겠슴다...

좋은 글.. ㅇㅇ.. 약소한 감사 선물.. ㅇㅇ 입니다

GOAT....좋은글 냠냠 감사합니다

좋아하는 칸예가 AI로 음악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비슷한 고민을 했었습니다.
핵심은 AI가 아니라 누가 방향을 정하고, 어떤 미학적 판단을 하느냐 겠죠?
좋은 글입니다. 저도 이렇게 글 잘쓰고 싶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필력이 상당하시네요.

맛집.

GOAT...미래는 아무도 모르기에 무섭지만서도 설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글한번 기똥차네

정말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의 판단 기준을 하나 더 만들어주셨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