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침 월가아재님의 글에 경제적 자유가 언급되었길래(Valley Space | Valley AI), 자유를 다루었던 이번 독서모임의 내용을 정리해본다.
11월의 독서 모임에서 선정한 책은 자유론(이사야 벌린)이다. 흔히 ‘자유론’이라고 하면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두 책의 원어 제목은 다르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은 On liberty이지만,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은 Four essays on liberty이다.
밀의 자유론은 분량이 짧을 뿐 아니라 고전에 반열에 오른 책이니만큼 많은 사람에게 친숙하다. 또한, 표현의 자유, 개인의 자유에 대한 사회적 제한의 한계 등 일상에서 접할 법한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도 읽기에 부담이 적다. 그러나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은 철학적, 역사적 관점에서 ‘자유 그 자체’를 논의한다는 점에서 난이도가 꽤 있는 편이다. 그럼에도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의 구별, 다른 가치와 구별되는 소극적 자유, 정치사상의 관점에서 적극적 자유를 비판한 부분 등에 담긴 통찰력이 돋보인다.
본래 자유란 사슬로부터의 자유, 투옥으로부터의 자유 등 ‘행동의 기회를 제약하는 것에서부터 자유로운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종류의 좌절로부터 해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길을 걷는데 앞에 커다란 돌이 놓여 있다면 이것은 자유를 제약한다. 그러나 내가 날고 싶은데 날개가 없어서 날지 못하는 것은 ‘무능력’이지 자유의 제한은 아니다.
한편, 자유는 ‘자유의 원활한 행사를 위한 조건’과 구분된다. 물리적인 안전, 건강, 무지, 빈곤 등은 자유의 원활한 행사를 저해한다. 예를 들어 어떤 바보가 자신이 신체, 이동 등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할 수 있다. 이때 바보에게 주어진 자유는 실질적으로 쓸모가 없지만, 그럼에도 그가 이러한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 사례에 대해 혹자는 “자유 그 자체보다 자유의 실현을 위한 조건이 중요한 것 아닌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유의 실현을 위한 조건이 마련되어 있더라도 자유 그 자체를 제약당하는 일이 더 끔찍한 경우도 상상해볼 수 있다. 영화 <올드보이>의 오대수는 신체적으로 건강하고, 정상적인 지능을 가진 사람이지만 어느 날 갑자기 방에서 나가지 못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리고 이러한 오대수의 삶은 자유롭게 밖을 노니는 바보의 삶보다 불행하다.
(이러한 구분에 따르면 소위 ‘경제적 자유’도 사실 자유가 제약되어 있다기보다는 자유를 실현할 조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것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한 보다 자세한 생각은 후술한다).
스스로 선택할 자유를 갖는다는 것, 어떻게 행동할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속성으로서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유가 언제 어디서나 최우선적인 가치는 아닐뿐더러 무제한으로 보장될 수 있는 것은 ...

경제적 자유라는 표현은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면과 맞닿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인터넷과 스마트폰 등이 (엄밀히 말하면 침해는 전혀 아니지만) 저희의 자유를 조금씩 갉아 먹고 있다랄까요? 물론 적어주신 글에서 논하는 철학적인 자유에 대한 논의와는 벗어나지만요 ㅎㅎ

경제적 자유라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욕망을 부추기고 좌절하게도 하는거 같습니다. 절제가 없다면 진정한 자유는 없을거같아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