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연재] 6. 돌봄과 차이 (미야자키 하야오)

[시리즈 연재] 6. 돌봄과 차이 (미야자키 하야오)

avatar
tolo
2026.02.09조회수 141회


다운로드.png
unnamed.png

(센과 치히로의 행방 불명)


'돌봄'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돌봄'의 어원을 보면 '돌다'와 '보다'의 합성어라고 나온다. 그러니 직역하면 '돌아서 보다' 정도 되는 것인데 우리의 삶에서 돌아볼 일이 뭐가 있을까.


신발 끈을 묶다가 멀어진 친구를 돌아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애인의 외침에 놀라 돌아볼 수 있고, 시장터에서 아이의 손을 잡고 있음에도 걱정되어서 돌아보는 어머니의 것이 있다. 그러니 누군가 나를 돌본다는 말은 계속해서 그 사람의 관심에 들어가 있다는 말이 되지 않을까? 우리는 돌봄에서 따뜻함을 느낀다.


그리고 어쩌면 이 돌아봄이 사랑의 원형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똑같아 보이는 무언가도 끊임없이 돌아보면 차이가 생기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전통적인 철학(플라톤~헤겔)의 학자들은 차이를 부수적인 것으로 보았다. 말하자면 '동일성'이라는 것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차이가 부수적으로 존재한다고 봤다.


하지만 현대로 넘어와서 들뢰즈라는 학자가 차이를 부수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차이를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 보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차이'가 먼저 존재하고, 동일성은 그 결과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나는 들뢰즈의 철학을 만나고 이런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사랑의 원형은 차이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이전 회차에서도 계속해서 말했듯이 사랑은 타자를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타자는 무엇인가?


'아토포스(한병철)', '부재자(김혜순)', '환자(윤동주)'처럼 다른 단어로 변주되지만 이를 꿰뚫는 핵심은 동일하다. 타자는 '비동일성'이다. 들뢰즈는 이걸 '차이'라고 했다.


그러니 어쩌면 들뢰즈가 기존 전통 철학자들과 다르게 '차이'가 모든 존재의 근원이라고 말했던 것은 '프랑스의 인권 선언'처럼 혁명적인 것이 아닐까.


들뢰즈의 말에 따르면 우리를 만드는 근원은 '차이'다. 그러니 우리는 '소유물(동일자)'이 아니라 '타자'이며 사랑받을 자격이 생긴다.


나는 왜 소중할까? 나는 왜 마땅히 사랑받아야 할까?


그것은 나는 세상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나와 아무리 똑같은 사람이라도 그 사람과 나는 '차이'가 존재한다. 나는 지구상의 완전한 타자이기 때문에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우리는 가끔 스스로가 한심하다고 느껴질 때 자신을 돌아본다. 왜 나는 이럴까 하면서 ...

회원가입만 해도
이 글을 무료로 읽을 수 있어요.

이미 계정이 있으신가요?로그인하기
댓글 8
avatar
tolo
구독자 306명구독중 64명
그렇구나..그렇다는 걸 나는 몰랐다. 나는 모르는 게 너무나도 많지만 어쩌자고 이런 것까지 모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