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연재] 8. 나? (김춘수)






(M.C. Escher - Encounter)
김혜순, 윤동주, 박준의 시 세계를 넘나들며 7주에 걸쳐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분간 사랑에 관해서는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없을 듯하다. (아마?)
그동안의 글에 귀 기울여 준 독자라면, 내가 다룬 '사랑'이 단순히 연인 간의 감정이라는 미시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나아가 이성 중심의 '통일성'에 대한 비판과 그로부터 파생된 전쟁, 사회문화라는 거시적 차원까지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조명해 보았음을 알 것이다.
내가 해석한 시편들을 통해, 비통일성으로서의 '사랑'이라는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수많은 시인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세상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려 했는지 그 노력이 전해졌기를 바란다.
앞으로 사랑이라는 주제가 다시 등장할지도 모르겠지만, 오늘은 시선을 돌려 한층 폭넓고 다채로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당분간 몇 주에 걸쳐서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 깊이 탐구해 보자.
오늘은 일본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가 던진 흥미로운 통찰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예전에 그의 소설 <한 남자>를 무척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다. 주제가 재밌어서 그런데 스토리를 우선 설명해야겠다.
소설 속 '리에'라는 인물은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잃는데, 장례식장에서 남편의 이름과 과거가 모두 거짓이었다는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한다. 리에는 변호사 '키도'에게 남편의 진짜 정체를 의뢰하고, 자신에게 한없이 다정했던 남편이 사실은 살인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작품은 이 서사를 통해 오늘의 주제가 되는 질문을 던진다.
'나를 구성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 물음에 매료되어 나는 그의 산문집 <나란 무엇인가>를 연이어 펼쳤고, 그곳에서 저자의 더 구체적인 사유를 엿볼 수 있었다.
저자의 말을 빌리면 나 개인이 아니라 분인이다. 그러니까 언어적으로 접근해 보면 개인(個人)은 '낱 개'를 쓰고 분인(分人)은 '나눌 분'을 쓴다. 전통적으로 사람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최소 단위였다. 낱 개를 쓰기 때문에 사람 한 명, 한 명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게이치로는 사람을 '분인'이라면서 나눌 수 있다고 봤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우리는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마다 그 사람 앞에서만 발현되는 '패턴'이 존재한다. 가령 군대에서 시작된 관계라면 사회에서 행동과 습관에서 계급적인 커뮤니케이션이 튀어나오고, 의사와 환자로 시작된 관계라면 행동과 습관에서 돌봄과 돌봐짐의 커뮤니케이션이 튀어나오는 법이다.
오랜만에 만난 동네 친구들 앞에서의 나,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나, 강의실에서 수업에 집중하는 나. 우리는 상황과 대상에 맞춰 각기 다른 행동과 습관을 꺼내 입는다. 그리고 이 다양한 패턴, 즉 '분인'들의 총합이 비로소 '나'라는 존재를 완성한다.
다들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숙제를 하지 않아 불같이 화를 내시던 어머니가, 선생님의 전화 한 통에 언제 그랬냐는 듯 "네, 선생님" 하며 한없이 상냥해지는 순간 말이다. 만약 인간이 단일한 '개인'이라면 어머니의 이런 태도는 모순이자 가식일 뿐이다. 하지만 게이치로의 시각에서 이는 모순이 아니다. 그저 '어머니'가 아닌 '학부모'로서의 정체성, 즉 새로운 분인이 발현된 것일 뿐이다. 한 사람 안에 존재하지만 인격적으로 분리된 이 패턴들, 그렇기에 개인은 곧 분인이다.
게이치로의 대부분의 소설이 이런 '분인주의' 사고 위에서 이뤄진다. 위에서 언급했던 <한 남자> 라는 책도 결국에 살인자인 남편의 과거와 자상하고 사랑을 베풀던 남친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이냐, 그러니까 이 두가지 인격을 한 사람이 품을 수 있는 것이냐에 대한 의문으로 끝난다.
이것을 통찰하면 많은 것이 이해가 된다. '정'이란, 그리고 '사랑'이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친구나 연인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다. 어쩌면 우리는 상대방 자체를 사랑하는 것을 넘어, '그 사람 앞에서 발현되는 특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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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 오늘도 정말 잘 읽었습니다! 김춘수 꽃 오랜만에 읽게되네요

잘 읽었습니다.
결핍의 해소를 한 분인의 부활의 관점으로 보는게 재밌네요, 시간되면 게이치로의 글도 읽어봐야겠습니다.

팬텀 스레드라는 영화를 찾아봐야겠습니다.
나라는 존재를 분인으로서 살펴보는 것도 해봐야겠습니다.
깊이 생각할 숙제를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엄미새, 엄마 동결건조...
방금 딸에게 물어봤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고.
그리고 답을 듣고 왜 아미새, 아빠 동결건조는 없냐고... ㅎㅎㅎ

저도 글 쓰면서 아빠 동결 건조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ㅎㅎ

오늘 팬텀 스레드를 감상했습니다. 상당히 독특한 영화입니다. 마치 Before 시리즈(midnight 등)를 볼 때 처럼 사람이 만들어내는 감정과 삶에서 겪는 갈등의 잔잔하지만 선명한 교차점들을 잘 그려낸 영화였습니다. tolo님 감상할 좋은 영화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그 누군가가 하는 일...?" 이라면 나는 누군가와의 관계를 통해 나 스스로에게 존재 의미를 부여하며 삶을 살아간다고 이해했습니다.
지금은 연락처조차 없는 멀어진 죽마고우 친구와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이제 그와의 관계가 없어도 나의 존재 의미를 확인시켜줄 다른 누군가와의 관계가 그 자리를 대체한 것 같습니다.
또 다른 관점으로는 죽마고우 친구 앞에서 보이던 나의 '분인'은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는 꽤나 부끄러워진 '분인' 인 것 같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연인과의 이별은 생각만 해도 다시 눈물이 고이는 일인 것 같습니다. 관계의 단절은 여러번 겪었으나 "내가 사랑했던 그녀와의 단절은 왜 더 슬프고 아팠을까?" 를 '분인' 이라는 틀에서 생각해보면,
'그녀 앞에서 근심걱정없이 해맑게 웃던 나' , '그녀를 미소짓게 만들고 싶어 실없는 장난을 치던 개구쟁이 같았던 나' 의 죽음을 슬퍼했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제게 "너를 항상 웃게 해주고 싶다. 그래서 너의 환한 미소를 매일 보고 싶어" 라는 존재의 의미를 준 그녀가 나의 '의미' 를 가지고 가면서 슬퍼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