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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연재] 10. 무의미한 삶과 자살 2 (알베르 카뮈)
life and market[2026 시리즈 연재]

[시리즈 연재] 10. 무의미한 삶과 자살 2 (알베르 카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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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lo
2026.03.09조회수 32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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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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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구나..그렇다는 걸 나는 몰랐다. 나는 모르는 게 너무나도 많지만 어쩌자고 이런 것까지 모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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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 Hunter - Death of Coltelli)



시지프 신화

누구나 철학 책을 읽으며 작가가 나를 멍청하다고 놀리는 기분을 받은 적이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 사람들은 책을 너무 어렵게 쓴다. 이건 독자들의 오래된 불평거리지만 나쁜 것은 아니다. 나도 고민해 보면 하이데거, 후설, 데리다 등등의 책을 읽으면서 쌍욕을 했었던 기억이 있지만, 동시에 이런 책들은 즐겁다.


비유하자면 등산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난이도가 있어야 사람들이 자주 찾아오고, 오랜 명소로 남는 것처럼 어쩌면 어렵게 쓴 철학 책도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카뮈의 《시지프 신화》는 어떨까. 《시지프 신화》는 몰라도 《이방인》은 많은 사람이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계문학전집으로 유명한 민음사에서 판매율 1, 2위를 다투고 있는 베스트셀러이고, 특히 표지에 박혀 있는 카뮈의 얼굴이라든지, 책의 시작부터 나오는 건조한 문체의 도입부가 이 책을 구매하게 만든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 이방인 13p

하지만 자신 있게 말하건대 베스트셀러 《이방인》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이 책 독자의 5%를 넘지 않을 것이다. 《이방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시지프 신화》를 이해해야 한다.


이건 내 개인적인 주장은 아니다. 카뮈는 실제로 《시지프 신화》를 1939년 9월부터 집필하기 시작했는데, 집필하기 이전 7월에 크리스티안 갈랭도에게 편지를 보내며 이것은 '부조리 사이클'이라고 설명한다.


말하자면 부조리 사이클에 있는 《시지프 신화》(철학 에세이), 《이방인》(소설), 《칼리굴라》(희곡) 이 세 가지 저작은 각각 독립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이클로서 서로 보완하고 보충하는 것이라, 《이방인》만 읽는다면 이 책을 이해하기보다 "이해했다고 착각"하기 쉽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출판하는 과정에서 《시지프 신화》의 원고를 미리 봤던 '말로'가 카뮈에게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시지프 신화》와 《이방인》의 친화 관계에 대해, 에세이인 《시지프 신화》가 소설인 《이방인》에 충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면서 출판사에 세 가지 책이 모두 출판되도록 압박을 넣은 만큼 카뮈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시지프 신화》에 대한 이해는 중요하다.


책을 직접 읽으면 좋겠지만 사실 《시지프 신화》의 난이도가 마냥 쉬운 것은 아니라서 이 책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특히 입문자들은 더욱 그렇다. 그러니 내 목표는 카뮈와 입문자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어떤 모양의 다리를 놓을까? 독일어 동사 중에 auffressen이라는 단어가 있다. 직역하면 '먹다' 정도인데 단어의 아우라를 조금 더 살려보기 위해 어원을 조금 보면 이 단어는 'auf-'와 'fressen'이 결합된 형태다. 'auf-'가 '완전히'라는 뜻이고, 'fressen'은 '게걸스럽게 먹다'라는 뜻이니 '완전히 처먹다' 정도다.


나는 이 단어가 체리피킹(cherry picking)의 완전한 반대말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내가 할 일은 카뮈가 나열한 개념들을 요약하는 일은 아니다. 이 글에서는 카뮈를 칭찬하겠지만 그의 사생활을 보기도 할 것이고 그의 책이 가지고 있는 논리적인 모순과 비약도 볼 것이다. 말하자면 말 그대로 "완전히 먹어 치울 것"이다.


시지프 신화가 어려운 이유

먼저 카뮈에 대한 환상을 깨야 할 것 같다. 카뮈의 《시지프 신화》는 분명히 좋은 책이지만 논리적으로 무결한 철학 책은 아니다. 이건 단순히 젊은 스물아홉 살 청년이 쓴 에세이(시도)일 뿐이다. 카뮈는 본인 스스로가 철학자가 아니라고도 이야기하며, 독일 학계에서 그를 철학자로 분류하지 않는 경우들도 많다.

나는 철학자가 아니다. 나는 어떤 체계를 믿을 만큼 충분히 이성을 믿지 않는다. 나의 관심사는 모럴이다. - <출판 직후 인터뷰에서>

이 문장에서 이 책이 어려운 이유를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카뮈 사상의 핵심인 '부조리'는 이성으로 환원되는 어떤 '개념'이 아니라 '감정'이기 때문이다.


'기쁨'이란 무엇인가를 아이에게 설명하려면 기뻤던 순간들에 느꼈던 감정들을 열거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카뮈는 책에서 '부조리의 감정'을 열거하기 때문에 글이 다소 추상적이고 모호하게 느껴진다. 이게 이 책이 어려운 첫 번째 이유다.


두 번째로 이 책은 많은 철학자를 동원해서 설명하기 때문에 어렵다. 키르케고르, 하이데거, 니체 등 많은 철학자의 개념을 인용하고 '이건 다 알지?' 하며 합의하고 넘어가는 뉘앙스라서, 인용된 학자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초심자들에게 이 책은 불친절할 것이다. 그리고 카뮈도 이를 잘 알고 있다.

다음의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금세기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것을 우리 눈으로 목도할 수 있는 어떤 부조리의 감성일 뿐,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 시대는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그 어떤 부조리의 철학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선 이 책이 우리 시대의 몇몇 탁월한 사상가들에게 빚지고 있는 바를 지적해두는 것은 기본적인 정직함에 속한다.

- <시지프 신화> 13p

그러니 내가 다리를 놓을 곳은 두 군데이다.

  1. 추상적이고, 감정적인 것에 대한 논리적 주석

  2. 불친절하게 인용된 철학자들에 대한 부연 설명


부조리 철학

카뮈의 철학을 한 줄로 요약하면 '부조리 철학'이겠다. 카뮈 본인도 《시지프 신화》의 시작을 '부조리'로 삼았고, 《시지프 신화》의 원래 제목은 '부조리'였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부조리가 결론으로 간주 되어 왔지만 이 논고에서는 그것을 하나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점을 지적해 두는 것이 좋겠다. - <시지프 신화> 13P

부조리가 뭘까? 한국에서 '부조리'라는 단어를 듣는다면 군대의 부조리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부조리를 라틴어로 재번역하면 'absurdus'가 되는데, 이것은 '불협'이라는 단어로 많이 사용된다.


부조리를 한자어 그대로 보더라도 '不(아닐 부)'를 앞에 쓰고 '條(가지 조)'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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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연재] 5. 아우슈비츠와 병원 (윤동주)

(Edward Hopper - morning sun) 작년에 재수 생활을 할 때 나는 동네 학원에서 1년을 보냈다. 나는 굉장히 낙천적인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재수 생활을 내 인생의 유일한 암흑기로 손꼽을 만큼 그 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다. 연애, 식사, 숙면이 통제되는 금욕에 가까운 생활, 그리고 재수생으로서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 성과가 뒤따르지 못할 때 느끼는 그 모든 부채감과 죄의식은 오롯이 나를 향했고, 그것은 서서히 자신을 갉아먹었다. 흔히들 '죄'수생이라고 부르며 감옥 생활과 비교하곤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재수생이 심적으로 더 고통스러운 것 같다. 죄인은 정해진 처벌을 받으면 채무(죄)에서 해방된다. 하지만 재수생에게 좌절은 전부 나의 잘못이며, 실패의 화살을 돌릴 곳이 오직 자신뿐이지 않은가. 내가 나를 착취하고 내가 나를 감시하는 가장 작은 사회가 바로 재수 생활이다. 물론 사회에 나가도 이런 경쟁은 끊임없겠지만, 모든 노력이 가시적인 수치와 등수로 치환된다는 점에서 재수 생활은 더욱 잔인하다. 재수 생활 중 수능 문학을 공부하며 배운 게 있다면, 모든 시는 '관찰'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시인은 세계를 관찰하며 자신만의 구조적 틀을 세우고, 그 구조를 압축하는 단어들을 정성껏 써 내려간다. 윤동주 시인의 <바람이 불어> 라는 시를 하나 보자.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 윤동주, 「바람이 불어」 중 여러분들이 이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이 시를 어디에서 영감을 받아서 썼을까 생각해보자. 아마 바람일 것이다. 어느 날 윤동주에게 문득 바람이 불었다. 아마 모두에게 바람이 불 것이다. 하지만 '관찰하는' 시인에게는 똑같이 불어오는 바람도 예민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문장이 써졌다.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고 말이다. 시인은 누구일까. 시인은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그런데 무엇으로부터? 바로 '관찰'로부터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이렇게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시인은 관찰하는 사람이다"라고. 우리는 가끔 시를 보면 시인의 훌륭한 '표현'에 많이 집중하지만, 그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화자가 무엇을 '관찰'했는지일 것이다. 시인은 이후에나 이 '관찰'을 정의할 단어를 찾아다니는 것뿐이다. 윤동주 그렇게 재수 학원에서 생활을 보내다가 문득 2026 수능특강에 윤동주의 <병원>이 실려 있는 것을 알았다. 윤동주라... 모두가 아는 시인이지만 동시에 모두가 모르는 시인이 아닐까 싶다. 나는 윤동주를 모른다. 알긴 아는데 정확히는 모른다. 그게 어려워서가 아니라 초등학교부터 재수 생활까지 내 공부에서 윤동주가 떨어져 나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윤동주가 일제 강점기 시절에 활동했던 시인이며 자기성찰과 부끄러움을 알았던 시인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다음은? 윤동주는 1942년 부산을 떠나 1945년 2월 16일 광복을 반년 앞둔 상황에서 뇌일혈로 요절했다. 근데 이건 단순한 사실관계일 뿐 그사이에 윤동주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그러니 우리가 그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의 시를 읽는 것뿐이다. 윤동주는 부산을 떠나기 1년 전, 그러니까 1941년에 연희전문학교(연세대)를 졸업하고 이를 기념해서 자필 시집을 제작했다고 한다. 그게 그 유명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이다. 나중에 신형철 평론가님의 책을 읽다 알게 된 것인데, 윤동주의 친구 정병욱의 말에 따르면 원래 윤동주 시집의 이름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아니라 <병원>이었다고 한다. 당시 윤동주는 세계가 거대한 병원이고 사람들은 모두 환자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병원' 이라는 단어는 그가 포착한 세계의 '구조' 를 압축하는 말이었다. 신형철,<몰락의 에티카>중 윤동주가 이 시를 시집의 제목으로 삼고 싶어 했기에, 그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한 첫 단추로 <병원>을 꺼내는 것은 무리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를 읽어보면 윤동주가 노래하는 '나도 모를 아픔'이 일제 강점기 지식인이 짊어져야 했던 시대적 비애라는 점은 자명해 보인다. 하지만 아픔과 슬픔은 엄연히 다르다. 슬프다고 해서 반드시 아픈 것은 아니며, 통증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장 슬픔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이 두 감정이 갈라지는 결정적인 지점은 어디일까. '슬픔'이 '아픔'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이 차이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슬픔이 구조적 통찰 이전의 즉각적인 반응이라면 아픔은 어떤 구조적 통찰 이후의 반성적 반응이다. -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시인은 단어의 예민한 사람임으로 '슬픔' 이 아니라 '아픔' 으로 쓴 이유가 있을 것이다. 2연에는 그 힌트가 있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에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슬픔을 아픔으로 바꾸어 말한 이유는 그가 스스로를 '환자'라고 정의했기 때문이 아닐까. 환자는 분명히 아픈 사람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자신을 환자라고 지칭하면서 대립하는 인물은 누구인가, '의사'가 아닐까? 위에서 말했듯이 윤동주에게 이 세계가 거대한 병원이었다는 점을 고수한다면, 의사는 단순한 의사가 아니라 '병원'이라는 세계를 운영하고 관리하는 무언가를 비유한 표현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겠다. 그렇다면 이 시는 어떤 맥락을 가지고 있는가? 이 시는 1939년 말에서 1941년 말 사이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1939년 9월 1일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고, 같은 해 '창씨개명령'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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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oneer
2026.03.10

아래의 문단에서 계속 읽어 내려가지 않고 잠시 멈춰서 아주 재밌는 상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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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우리의 반응은 두 가지일 것이다.

1. 에이, 목사님의 믿음이 부족했네

2. 역시 우리의 관점에서는 신의 의도는 알 수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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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게 세번째 견해를 주장했을 것 같습니다.

"내가 이해했던 (전통적인) 신의 운행 방식은 상당히 잘 못되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 생각도 분명히 (미래의) 신을 믿는다는 인류에게 동일한 지적을 받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 견해는 그다지 틀릴 것도 없는게, 수천년 동안 이어온 어떤 한 종교에서 조차도 신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당대 (평균적인) 사람들의 생각은 시대가 변하면서 드라마틱할 정도로 심하게 변화해왔다는 점이 그것을 증명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을 이어가게 한 좋은 글을 써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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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창이
2026.03.10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항상 알기 쉽게 좋은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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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로잉
2026.03.11

카뮈의 시지프 신화, 이방인, 칼리쿨라가 서로 상호 보완적인 이야기라는게 흥미가 갑니다. 기회가 되면 세권다 읽어봐야겠네요.

오늘도 tolo님의 글을 잘 auffressen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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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ncheese
2026.03.27

카뮈 시리즈를 읽을 때 저는 삶의 유한성과 무의미함이, 역설적으로 자유를 가져다준다는 점이 인상깊었습니다.

자유를 가진 인간이 어떤 가치를 추구할 것인가에 대해서 카뮈는 페스트, 반항하는 인간, 그리고 사고로 미완된 '사랑' 시리즈에서 말하고 싶었지 않았을까요? 개인적으로 아마 그 결론은 tolo님의 1~8편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같은 책을 보아도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니 좋습니다. 잘읽었습니다.

(수정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