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엄
예측대회
투자분석
아카데미
커뮤니티
Valley AI 시작하기시작하기
Valley Space인기
[시리즈 연재] : 11. 우리는 왜 변해야할까?(릴케)
life and market[2026 시리즈 연재]

[시리즈 연재] : 11. 우리는 왜 변해야할까?(릴케)

avatar
tolo
2026.03.16조회수 181회
avatar
tolo
구독자 341명구독중 69명
그렇구나..그렇다는 걸 나는 몰랐다. 나는 모르는 게 너무나도 많지만 어쩌자고 이런 것까지 모르는가.


다운로드.jpeg
unnamed.png

핀다로스의 시와 아킬레우스 이야기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읽어보면 처음에 짧은 시 한 구절이 소개된다.

오, 나의 영혼아,

불멸의 삶을 갈망하지 말고 가능의 영역을

남김없이 다 살려고 노력하라.

- 핀다로스, <아폴로 기념 경기 우승자에게 바치는 축가 3>

핀다로스는 고대 그리스 시인으로 기원전 사람인데도 그가 읊었던 시가 현대까지 전승되어 카뮈에게도 인용되었다는 사실은 놀랍다. 심지어 내용적인 측면에서 카뮈가 하는 이야기와 밀접하게 닿아 있다는 점이 기원전부터 인간의 '필멸'이 전 세대를 거쳐서 논의되었던 것을 보여 준다.


언젠가 플라톤의 <향연>에서 이런 문장을 읽었던 것 같다. 사랑이란 '좋은 것이 늘 자신에게 있는 것에 대한 것'이라는 것, 이 문장을 조금 틀어서 바라보면 인간이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면 이 문장은 명령처럼 작용해서 우리들의 행동을 자극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에 우리에게 '좋은 것' 가령, '붉은 비단' 따위가 없다고 해 보자. 우리는 '사랑'이라는 상태로 나아가기 위해서 붉은 비단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마침내 얻는다면 사랑에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사랑한다. 건강이 없는 사람이 건강을 사랑하고, 지혜가 없는 사람들이 지혜를 사랑한다.


사랑이 결핍의 충족을 명령한다면 인간의 가장 거대한 결핍인 필멸이라는 운명은 그 반대인 불멸의 형식으로 충족되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반드시 죽는 필멸자이니 어떤 형식으로든 모든 인간은 '불멸'을 꿈꾼다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아이를 낳는 것은 우리 유전자의 불멸을 위해서고, 거대한 역사의 기록들은 사색의 불멸을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모든 문학의 시초라고 평가되는 <일리아스> 서사시의 주인공 '아킬레우스'의 선택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fm0P4dVs5lpVdHmBZ9gjny1amVgnwzpSAOjftQtwhL5bIFTd8tZBHA4uUgKWcaHbvp3oQdcORLSNMdp7pLTnlQ.webp

모르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아 내용을 짧게 설명하겠다. <일리아스>는 헬레네라는 인물을 두고 일어난 그리스와 트로이의 거대한 전쟁인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다. 여기 그리스의 최고 전력이자 전쟁 영웅인 아킬레우스는 한 고민에 빠진다. 바로 아킬레우스의 어머니 테티스로부터 들은 두 가지 운명의 갈림길이 그의 고민거리였다.


예언은 단순했다. 전쟁에 참여하면 불멸의 명성을 얻게 될 것이지만 결국에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죽게 된다는 것.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짧고 굵게 살 것인가, 가늘고 길게 살 것인가의 두 가지 갈림길이 그의 앞에 펼쳐진 것이다. 영웅이라면 당연히 전자라고 생각하겠지만 처음에 아킬레우스의 선택은 후자로 기울었다.


총사령관인 ...

회원가입만 해도
이 글을 무료로 읽을 수 있어요.

Basic 7일 무료 체험 시작하기
이미 계정이 있으신가요?로그인하기
댓글 5개
[2026 시리즈 연재] 카테고리의 다른글

[시리즈 연재] 10. 무의미한 삶과 자살 2 (알베르 카뮈)

(Tom Hunter - Death of Coltelli) 시지프 신화 누구나 철학 책을 읽으며 작가가 나를 멍청하다고 놀리는 기분을 받은 적이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 사람들은 책을 너무 어렵게 쓴다. 이건 독자들의 오래된 불평거리지만 나쁜 것은 아니다. 나도 고민해 보면 하이데거, 후설, 데리다 등등의 책을 읽으면서 쌍욕을 했었던 기억이 있지만, 동시에 이런 책들은 즐겁다. 비유하자면 등산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난이도가 있어야 사람들이 자주 찾아오고, 오랜 명소로 남는 것처럼 어쩌면 어렵게 쓴 철학 책도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카뮈의 《시지프 신화》는 어떨까. 《시지프 신화》는 몰라도 《이방인》은 많은 사람이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계문학전집으로 유명한 민음사에서 판매율 1, 2위를 다투고 있는 베스트셀러이고, 특히 표지에 박혀 있는 카뮈의 얼굴이라든지, 책의 시작부터 나오는 건조한 문체의 도입부가 이 책을 구매하게 만든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 이방인 13p 하지만 자신 있게 말하건대 베스트셀러 《이방인》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이 책 독자의 5%를 넘지 않을 것이다. 《이방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시지프 신화》를 이해해야 한다. 이건 내 개인적인 주장은 아니다. 카뮈는 실제로 《시지프 신화》를 1939년 9월부터 집필하기 시작했는데, 집필하기 이전 7월에 크리스티안 갈랭도에게 편지를 보내며 이것은 '부조리 사이클'이라고 설명한다. 말하자면 부조리 사이클에 있는 《시지프 신화》(철학 에세이), 《이방인》(소설), 《칼리굴라》(희곡) 이 세 가지 저작은 각각 독립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이클로서 서로 보완하고 보충하는 것이라, 《이방인》만 읽는다면 이 책을 이해하기보다 "이해했다고 착각"하기 쉽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출판하는 과정에서 《시지프 신화》의 원고를 미리 봤던 '말로'가 카뮈에게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시지프 신화》와 《이방인》의 친화 관계에 대해, 에세이인 《시지프 신화》가 소설인 《이방인》에 충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면서 출판사에 세 가지 책이 모두 출판되도록 압박을 넣은 만큼 카뮈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시지프 신화》에 대한 이해는 중요하다. 책을 직접 읽으면 좋겠지만 사실 《시지프 신화》의 난이도가 마냥 쉬운 것은 아니라서 이 책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특히 입문자들은 더욱 그렇다. 그러니 내 목표는 카뮈와 입문자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어떤 모양의 다리를 놓을까? 독일어 동사 중에 auffressen이라는 단어가 있다. 직역하면 '먹다' 정도인데 단어의 아우라를 조금 더 살려보기 위해 어원을 조금 보면 이 단어는 'auf-'와 'fressen'이 결합된 형태다. 'auf-'가 '완전히'라는 뜻이고, 'fressen'은 '게걸스럽게 먹다'라는 뜻이니 '완전히 처먹다' 정도다. 나는 이 단어가 체리피킹(cherry picking)의 완전한 반대말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내가 할 일은 카뮈가 나열한 개념들을 요약하는 일은 아니다. 이 글에서는 카뮈를 칭찬하겠지만 그의 사생활을 보기도 할 것이고 그의 책이 가지고 있는 논리적인 모순과 비약도 볼 것이다. 말하자면 말 그대로 "완전히 먹어 치울 것"이다. 시지프 신화가 어려운 이유 먼저 카뮈에 대한 환상을 깨야 할 것 같다. 카뮈의 《시지프 신화》는 분명히 좋은 책이지만 논리적으로 무결한 철학 책은 아니다. 이건 단순히 젊은 스물아홉 살 청년이 쓴 에세이(시도)일 뿐이다. 카뮈는 본인 스스로가 철학자가 아니라고도 이야기하며, 독일 학계에서 그를 철학자로 분류하지 않는 경우들도 많다. 나는 철학자가 아니다. 나는 어떤 체계를 믿을 만큼 충분히 이성을 믿지 않는다. 나의 관심사는 모럴이다. - <출판 직후 인터뷰에서> 이 문장에서 이 책이 어려운 이유를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카뮈 사상의 핵심인 '부조리'는 이성으로 환원되는 어떤 '개념'이 아니라 '감정'이기 때문이다. '기쁨'이란 무엇인가를 아이에게 설명하려면 기뻤던 순간들에 느꼈던 감정들을 열거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카뮈는 책에서 '부조리의 감정'을 열거하기 때문에 글이 다소 추상적이고 모호하게 느껴진다. 이게 이 책이 어려운 첫 번째 이유다. 두 번째로 이 책은 많은 철학자를 동원해서 설명하기 때문에 어렵다. 키르케고르, 하이데거, 니체 등 많은 철학자의 개념을 인용하고 '이건 다 알지?' 하며 합의하고 넘어가는 뉘앙스라서, 인용된 학자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초심자들에게 이 책은 불친절할 것이다. 그리고 카뮈도 이를 잘 알고 있다. 다음의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금세기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것을 우리 눈으로 목도할 수 있는 어떤 부조리의 감성일 뿐,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 시대는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그 어떤 부조리의 철학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선 이 책이 우리 시대의 몇몇 탁월한 사상가들에게 빚지고 있는 바를 지적해두는 것은 기본적인 정직함에 속한다. - <시지프 신화> 13p 그러니 내가 다리를 놓을 곳은 두 군데이다. 추상적이고, 감정적인 것에 대한 논리적 주석 불친절하게 인용된 철학자들에 대한 부연 설명 부조리 철학 카뮈의 철학을 한 줄로 요약하면 '부조리 철학'이겠다. 카뮈 본인도 《시지프 신화》의 시작을 '부조리'로 삼았고, 《시지프 신화》의 원래 제목은 '부조리'였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부조리가 결론으로 간주 되어 왔지만 이 논고에서는 그것을 하나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점을 지적해 두는 것이 좋겠다. - <시지프 신화> 13P 부조리가 뭘까? 한국에서 '부조리'라는 단어를 듣는다면 군대의 부조리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부조리를 라틴어로 재번역하면 'absurdus'가 되는데, 이것은 '불협'이라는 단어로 많이 사용된다. 부조리를 한자어 그대로 보더라도 ...
[2026 시리즈 연재]
2026. 03. 09
23
4
327
[시리즈 연재] 10. 무의미한 삶과 자살 2 (알베르 카뮈)

[시리즈 연재] 9. 무의미한 삶과 자살 (알베르 카뮈)

(Édouard Manet - 자살) 최근에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으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이 책은 단순한 로맨스 소설로 읽힐 수도 있지만, 동시에 'survive(생존하다)'와 'live(살아가다)'의 차이를 성찰하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는 생각이다. 개인적으로 한국어 번역이 이 단어들의 미묘한 차이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고 느껴서, 영어 어원에 집중해 보면 그 차이가 더 선명해질지도 모르겠다. 'survive'는 라틴어 'supervivere'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원을 쪼개 보면 'super-(넘어서)'와 'vivere(살다)'가 합쳐진 형태이니, '죽음의 고비를 넘기다' 정도로 이해하면 어떨까? 실제로 <쇼미더머니> 같은 경쟁 프로그램이 'survival program'이지 'live program'이라 불리지 않으니 맞는 말일 것이다. 'live'의 기원은 더 복잡한데, 인도유럽조어의 뿌리인 'leip'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흥미롭게도 이 어근은 '살다'라는 뜻 이전에 '남겨지다'라는 의미를 품고 있었다. 제미나이에게 직관적인 설명을 요청해 보니, 'live'와 'leave(남기다)'가 어원적으로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지점에서 'survive'와 'live'의 차이는 분명해진다. 'survive'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길 요구하는 역동적인 '동사'라면, 'live'는 존재 그 자체로 머무르는 '형용사'적 상태에 가깝다는 점이다. 내가 이 미묘한 차이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이것이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본질적인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남자 주인공인 시몽이 여자 주인공 폴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이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그 대신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 시몽이 보기에 폴은 고독한 사람이다. 왜?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의무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다. 이 책은 1959년 프랑스에서 쓰인 작품이지만 2026년 한국을 정확하게 관통한다. 자주 언급되듯이 현대인들은 고독하다. 사강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사랑을 지나치고 행복을 소홀히 했기에 고독이라는 벌을 받은 것이다.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사랑과 행복 대신 핑계와 편법, 그리고 체념을 선택하며 살아간다. "대학교만 가면", "취직만 하면", "집만 사면", "결혼만 하면", "아이만 낳으면" 같은 핑계와 체념이 우리의 행복과 사랑을 자꾸만 뒤로 미루게 만든다. 말하자면 우리의 삶은 'survive' 하며 나이에 맞는 허들을 뛰어넘는 과정일 뿐, 제자리에...
[2026 시리즈 연재]
2026. 03. 02
33

[시리즈 연재] 8. 나? (김춘수)

(M.C. Escher - Encounter) 김혜순, 윤동주, 박준의 시 세계를 넘나들며 7주에 걸쳐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분간 사랑에 관해서는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없을 듯하다. (아마?) 그동안의 글에 귀 기울여 준 독자라면, 내가 다룬 '사랑'이 단순히 연인 간의 감정이라는 미시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나아가 이성 중심의 '통일성'에 대한 비판과 그로부터 파생된 전쟁, 사회문화라는 거시적 차원까지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조명해 보았음을 알 것이다. 내가 해석한 시편들을 통해, 비통일성으로서의 '사랑'이라는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수많은 시인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세상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려 했는지 그 노력이 전해졌기를 바란다. 앞으로 사랑이라는 주제가 다시 등장할지도 모르겠지만, 오늘은 시선을 돌려 한층 폭넓고 다채로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당분간 몇 주에 걸쳐서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 깊이 탐구해 보자. 게이치로 : 나란 무엇인가? 오늘은 일본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가 던진 흥미로운 통찰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예전에 그의 소설 <한 남자>를 무척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다. 주제가 재밌어서 그런데 스토리를 우선 설명해야겠다. 소설 속 '리에'라는 인물은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잃는데, 장례식장에서 남편의 이름과 과거가 모두 거짓이었다는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한다. 리에는 변호사 '키도'에게 남편의 진짜 정체를 의뢰하고, 자신에게 한없이 다정했던 남편이 사실은 살인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작품은 이 서사를 통해 오늘의 주제가 되는 질문을 던진다. '나를 구성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 물음에 매료되어 나는 그의 산문집 <나란 무엇인가>를 연이어 펼쳤고, 그곳에서 저자의 더 구체적인 사유를 엿볼 수 있었다. 저자의 말을 빌리면 나 개인이 아니라 분인이다. 그러니까 언어적으로 접근해 보면 개인(個人)은 '낱 개'를 쓰고 분인(分人)은 '나눌 분'을 쓴다. 전통적으로 사람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최소 단위였다. 낱 개를 쓰기 때문에 사람 한 명, 한 명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게이치로는 사람을 '분인'이라면서 나눌 수 있다고 봤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우리는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마다 그 사람 앞에서만 발현되는 '패턴'이 존재한다. 가령 군대에서 시작된 관계라면 사회에서 행동과 습관에서 계급적인 커뮤니케이션이 튀어나오고, 의사와 환자로 시작된 관계라면 행동과 습관에서 돌봄과 돌봐짐의 커뮤니케이션이 튀어나오는 법이다. 오랜만에 만난 동네 친구들 앞에서의 나,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나, 강의실에서 수업에 집중하는 나. 우리는 상황과 대상에 맞춰 각기 다른 행동과 습관을 꺼내 입는다. 그리고 이 다양한 패턴, 즉 '분인'들의 총합이 비로소 '나'라는 존재를 완성한다. 다들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숙제를 하지 않아 불같이 화를 내시던 어머니가, 선생님의 전화 한 통에 언제 그랬냐는 듯 "네, 선생님" 하며 한없이 상냥해지는 순간 말이다. 만약 인간이 단일한 '개인'이라면 어머니의 이런 태도는 모순이자 가식일 뿐이다. 하지만 게이치로의 시각에서 이는 모순이 아니다. 그저 '어머니'가 아닌 '학부모'로서의 정체성, 즉 새로운 분인이 발현된 것일 뿐이다. 한 사람 안에 존재하지만 인격적으로 분리된 이 패턴들, 그렇기에 개인은 곧 분인이다. 게이치로의 대부분의 소설이 이런 '분인주의' 사고 위에서 이뤄진다. 위에서 언급했던 <한 남자> 라는 책도 결국에 살인자인 남편의 과거와 자상하고 사랑을 베풀던 남친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이냐, 그러니까 이 두가지 인격을 한 사람이 품을 수 있는 것이냐에 대한 의문으로 끝난다. 이것을 통찰하면 많은 것이 이해가 된다. '정'이란, 그리고 '사랑'이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친구나 연인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다. 어쩌면 우리는 상대방 자체를 사랑하는 것을 넘어, ...
[2026 시리즈 연재]
2026. 02. 23
16

[시리즈 연재] 7. 공감과 T의 위로 (박준)

(Winterville, Tom Hunter) 대학에 입학하고 처음 교류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보니 낯선 이들과 대화를 하기 일쑤다. 문득 MBTI가 뭐냐는 질문이 아이스 브레이킹용으로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ENTP인데 E랑 I는 번갈아 가면서 나오고 N과 T는 거의 100%로 나온다. 이상하게 나를 오래 본 사람들은 내가 T 100%라고 주장하면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 당연히 F인 줄 알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기분이 나쁘진 않다. 어쩌면 내가 그만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기도 하고, 적절한 조언을 드렸다는 것이니까. 허나, 이런 T들의 공감에 대해서 각주를 달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서 그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한다. 공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바로 sympathy와 empathy다. 둘의 차이가 굉장히 미미해서 어원적인 차이로 들어가 보면 둘이 공유하고 있는 단어인 'pathy'는 '감정(pathos)'을 의미한다. 둘의 차이가 보이는 sympathy의 'sym'은 '함께(with)'를 뜻하고 empathy의 'em'은 '안으로(into)'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sympathy는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 공감(F)'이고, empathy는 상대방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인지적으로 추론하는 '인지적 공감(T)'에 가깝다. 이 언어적 사실에 기댄다면 공감이 선천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반쪽짜리 사실이다. 그러니 마치 T와 F가 비공감과 공감으로 번역되고 T는 개인주의, F는 이타주의로 분류되는 것은 틀린 일이다. T는 오히려 매우 공감을 잘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지적 공감은 뭘까? 본질적으로 타자를 향해 들어가는(em) 자세다. 우리는 타인이 타자(어찌할 수 없음)라는 점에서 그들을 완전히 이해해 볼 수는 없지만, 타자를 향해 들어가려는 자세의 본질은 에로스에 가깝다. 타자를 내 안으로 집어넣는 것(나르시시즘)이 아니라, 내가 타자로 가는 행위(에로스)니까 말이다. 이때 우리는 빠져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들의 삶에 빠져 죽는 정신적인 자살이 인지적 공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흔히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을 하는데 이걸 맞아맞아 하고 넘어갈 게 아니라 정색하고 한번 왜 그런지 따져 물어봐야 한다. 신형철 평론가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슬픔을 겪을 때 응분의 몫 이상을 받는다. 말하자면 1이라는 슬픔이 있다면 0.5 ...
[2026 시리즈 연재]
2026. 02. 16
20

[시리즈 연재] 6. 돌봄과 차이 (미야자키 하야오)

(센과 치히로의 행방 불명) '돌봄'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돌봄'의 어원을 보면 '돌다'와 '보다'의 합성어라고 나온다. 그러니 직역하면 '돌아서 보다' 정도 되는 것인데 우리의 삶에서 돌아볼 일이 뭐가 있을까. 신발 끈을 묶다가 멀어진 친구를 돌아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애인의 외침에 놀라 돌아볼 수 있고, 시장터에서 아이의 손을 잡고 있음에도 걱정되어서 돌아보는 어머니의 것이 있다. 그러니 누군가 나를 돌본다는 말은 계속해서 그 사람의 관심에 들어가 있다는 말이 되지 않을까? 우리는 돌봄에서 따뜻함을 느낀다. 그리고 어쩌면 이 돌아봄이 사랑의 원형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똑같아 보이는 무언가도 끊임없이 돌아보면 차이가 생기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전통적인 철학(플라톤~헤겔)의 학자들은 차이를 부수적인 것으로 보았다. 말하자면 '동일성'이라는 것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차이가 부수적으로 존재한다고 봤다. 하지만 현대로 넘어와서 들뢰즈라는 학자가 차이를 부수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차이를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 보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차이'가 먼저 존재하고, 동일성은 그 결과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나는 들뢰즈의 철학을 만나고 이런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사랑의 원형은 차이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이전 회차에서도 계속해서 말했듯이 사랑은 타자를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타자는 무엇인가? '아토포스(한병철)', '부재자(김혜순)', '환자(윤동주)'처럼 다른 단어로 변주되지만 이를 꿰뚫는 핵심은 동일하다. 타자는 '비동일성'이다. 들뢰즈는 이걸 '차이'라고 했다. 그러니 어쩌면 들뢰즈가 기존 전통 철학자들과 다르게 '차이'가 모든 존재의 근원이라고 말했던 것은 '프랑스의 인권 선언'처럼 혁명적인 것이 아닐까. 들뢰즈의 말에 따르면 우리를 만드는 근원은 '차이'다. 그러니 우리는 '소유물(동일자)'이 아니라 '타자'이며 사랑받을 자격이 생긴다. 나는 왜 소중할까? 나는 왜 마땅히 사랑받아야 할까? 그것은 나는 세상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나와 아무리 똑같은 사람이라도 그 사람과 나는 '차이'가 존재한다. 나는 지구상의 완전한 타자이기 때문에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우리는 가끔 스스로가 한심하다고 느껴질 때 자신을 돌아본다. ...
[2026 시리즈 연재]
2026. 02. 09
21
8
14
323
[시리즈 연재] 9. 무의미한 삶과 자살 (알베르 카뮈)
9
171
[시리즈 연재] 8. 나? (김춘수)
11
231
[시리즈 연재] 7. 공감과 T의 위로 (박준)
170
[시리즈 연재] 6. 돌봄과 차이 (미야자키 하야오)
avatar
창창이
2026.03.16

오늘도 잘읽었습니다 오늘도 변화량을 1 더 더하는 삶을 살아봐야겠습니다

avatar
큐로잉
2026.03.16

잘 읽었습니다.

avatar
배당주 투자
2026.03.16

책도 읽고 벨리에있는 시리즈물도 읽다보니

요즘 무의미한 반복이 변화로 바뀌는것같습니다.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avatar
호호아저씨
2026.03.16

우와... 시리즈 정주행갑니다

avatar
Pioneer
2026.03.17

“필멸(언젠가 끝남)을 인정하되, 삶을 ‘반복’이 아니라 ‘변주(새로운 전개)’로 채워야 한다.”

이 부분이 가장 마음에 남습니다. 필멸의 인정은 이미했지만 반복이 아닌 변주로 채워야 한다는 관점을 새롭게 가져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