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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연재] 13. 전쟁과 그라운드 제로 (모신 하미드)
life and market[2026 시리즈 연재]

[시리즈 연재] 13. 전쟁과 그라운드 제로 (모신 하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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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lo
2026.03.29조회수 21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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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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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구나..그렇다는 걸 나는 몰랐다. 나는 모르는 게 너무나도 많지만 어쩌자고 이런 것까지 모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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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alling Man, September 11, 2001 : 2001년 9월 11일, 한 남자가 뉴욕 세계무역센터에서 뛰어내렸다)



전쟁에 대한 이야기

최근 미국이 이란을 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최근 4개월간 제대로 된 투자를 진행하지 않아 시황과 거리감이 생겼고, 이 화제에 대해 어떠한 비판이나 찬성도 어쩌면 의견조차 밝힐 수 없는 상태다. (안 하는 게 아니라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소식을 듣고 내가 어땠는지를 떠올려본다. 그리고 그 생각의 끝에서 (아직 정리되진 않았지만) 전쟁에 대한 이야기, 정확히는 재난 상황(그라운드 제로)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 같다.


솔직한 심정으로 전쟁 뉴스를 봤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우선 신이 났다는 것이다. 석유 롱 포지션이 조금 있었고 코스피를 며칠 전에 매도했기에, 거기서 오는 희열이 우선이었다. 혐오스럽거나 모순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사람이 아니다. 그저 당혹스러울 정도로 비도덕적인 '인간적 진실'에 충실하고자 고백하는 바이다.


어쩌면 이런 반응이야말로 인간적이지 않을까?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이는 사실일 수 있다. 18세기 영국의 사상가들(데이비드 흄, 애덤 스미스)이 '동정은 상상과 추론이 필요하기에 반사적인 첫 반응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던 것을 생각해보자. 당신은 기억에서 지웠을지 몰라도, 적어도 투자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계좌에 먼저 관심이 쏠렸을 것이며 이를 비인간적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도덕적일지언정 인간의 특징이니까.)


두 번째로는 이런 '비도덕적인 나'를 '억제하는 나'가 이란과 미국의 거대한 전쟁에서 소외되는 약자에게 귀를 기울이게 했다. 아마 행동경제학적으로는 시스템 1과 시스템 2 정도가 될 텐데, 직관이나 충동(일종의 공황)이 지나가면 사람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생각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세 번째로는 무력감이 들었다. 패권국인 미국이 이란을 공격하고 있는 상황을 과연 누가 막을 수 있을까. 명분도 불명확한 전쟁임에도 그 누구도 도덕적인 질타로 막을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근대에 일어났던 문명의 비극들을 가르치고 전쟁의 무게를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다.


나는 반전주의자도 아니고 전쟁의 불가피함을 잘 아는 현실적인 사람이지만, 요즘의 전쟁이 너무 가볍게 시작된다는 점은 우려스럽다. 더불어 우리의 생각조차 너무 가볍다는 사실은 이제 기괴하기까지 하다. 이 거대함 속에서 피해자는 작은 부분인 '숫자'로 기억될 뿐이며, 전쟁의 규모를 상징하는 단어가 되어버린다. 여기서 대체 문학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땅 위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태를 뜻한다. 과거에는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점을 의미했으나, 9.11 테러 이후 이 단어가 널리 쓰이면서 거대한 재난 상황 그 자체를 상징하게 되었다.


만약 한국에 거대한 그라운드 제로가 발생하여 사회 전체가 집단적 공황에 빠졌다고 가정해 보자. 이때 문학은 과연 어떤 유용성을 발휘할 수 있을까?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일본의 추리 작가 다카하시 가쓰히코는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예술이니 뭐니 말할 상황이 아니다. 그것보다 우유와 가솔린의 확보가 소중하다. 이러한 사실에, 문예에 관계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절망과 슬픔을 느낀다. 내가 해왔던 일은 결국 무의미한 것이었을까?

맞는 말이다. 어떠한 명작가의 명작이더라도 그라운드 제로 앞에서는 우유와 가솔린보다 못하다. 이에 대해 신형철 평론가는 이런 말을 했다.

현실의 그라운드 제로는 그대로 문학의 그라운드 제로가 된다. - 신형철, <9.11과 3.11, 혹은 문학의 그라운드 제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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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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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hinshar
2026.03.29

덕분에 깊이있는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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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창이
2026.03.30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공감이 많이되는 글이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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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로잉
2026.03.30

잘 읽었습니다.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타인에게 관용적일 수 있을 텐, 요즘은 모두가 그 여유를 잃어가는 것 같아 안타깝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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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oneer
2026.03.31

찬성하지 않으면 설령 이슬람교도가 아닐지라도 즉시 '적'으로 간주되어 보복당했으므로, 분노로 점철된 폭력성이 사회적 합의를 이룬 셈이다. '동지 아니면 적', 그사이의 회색지대는 없었다.

그랬습니다. 정말 그 당시 미국 전체는 압도적 분노로 일사천리의 보복을 전쟁이라는 형태로 이행했습니다. 테러보다 그 분노에 더 놀랐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격한 분쟁과 그것을 바라볼 문학적 시각에 대해서 생각해봤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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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를넘어
2026.07.21

그라운드 제로와 시작점

땅위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를 뜻하지만, 다른 의미로는 땅위의 형태가 다른 것으로 변했다고 볼 수 있을까?

이전 글인 카뮈 이방인 이야기에서 퇴직자,사형수의 마음을 이야기한 내용이 떠올랐다.

그리고 주식시장 안에서 싸이클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어떤 것이 사라지고 어떤 것으로 변해가는 것인가?

그럼에도 남아 있는 것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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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연재] 10. 무의미한 삶과 자살 2 (알베르 카뮈)

(Tom Hunter - Death of Coltelli) 시지프 신화 누구나 철학 책을 읽으며 작가가 나를 멍청하다고 놀리는 기분을 받은 적이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 사람들은 책을 너무 어렵게 쓴다. 이건 독자들의 오래된 불평거리지만 나쁜 것은 아니다. 나도 고민해 보면 하이데거, 후설, 데리다 등등의 책을 읽으면서 쌍욕을 했었던 기억이 있지만, 동시에 이런 책들은 즐겁다. 비유하자면 등산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난이도가 있어야 사람들이 자주 찾아오고, 오랜 명소로 남는 것처럼 어쩌면 어렵게 쓴 철학 책도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카뮈의 《시지프 신화》는 어떨까. 《시지프 신화》는 몰라도 《이방인》은 많은 사람이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계문학전집으로 유명한 민음사에서 판매율 1, 2위를 다투고 있는 베스트셀러이고, 특히 표지에 박혀 있는 카뮈의 얼굴이라든지, 책의 시작부터 나오는 건조한 문체의 도입부가 이 책을 구매하게 만든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 이방인 13p 하지만 자신 있게 말하건대 베스트셀러 《이방인》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이 책 독자의 5%를 넘지 않을 것이다. 《이방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시지프 신화》를 이해해야 한다. 이건 내 개인적인 주장은 아니다. 카뮈는 실제로 《시지프 신화》를 1939년 9월부터 집필하기 시작했는데, 집필하기 이전 7월에 크리스티안 갈랭도에게 편지를 보내며 이것은 '부조리 사이클'이라고 설명한다. 말하자면 부조리 사이클에 있는 《시지프 신화》(철학 에세이), 《이방인》(소설), 《칼리굴라》(희곡) 이 세 가지 저작은 각각 독립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이클로서 서로 보완하고 보충하는 것이라, 《이방인》만 읽는다면 이 책을 이해하기보다 "이해했다고 착각"하기 쉽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출판하는 과정에서 《시지프 신화》의 원고를 미리 봤던 '말로'가 카뮈에게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시지프 신화》와 《이방인》의 친화 관계에 대해, 에세이인 《시지프 신화》가 소설인 《이방인》에 충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면서 출판사에 세 가지 책이 모두 출판되도록 압박을 넣은 만큼 카뮈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시지프 신화》에 대한 이해는 중요하다. 책을 직접 읽으면 좋겠지만 사실 《시지프 신화》의 난이도가 마냥 쉬운 것은 아니라서 이 책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특히 입문자들은 더욱 그렇다. 그러니 내 목표는 카뮈와 입문자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어떤 모양의 다리를 놓을까? 독일어 동사 중에 auffressen이라는 단어가 있다. 직역하면 '먹다' 정도인데 단어의 아우라를 조금 더 살려보기 위해 어원을 조금 보면 이 단어는 'auf-'와 'fressen'이 결합된 형태다. 'auf-'가 '완전히'라는 뜻이고, 'fressen'은 '게걸스럽게 먹다'라는 뜻이니 '완전히 처먹다' 정도다. 나는 이 단어가 체리피킹(cherry picking)의 완전한 반대말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내가 할 일은 카뮈가 나열한 개념들을 요약하는 일은 아니다. 이 글에서는 카뮈를 칭찬하겠지만 그의 사생활을 보기도 할 것이고 그의 책이 가지고 있는 논리적인 모순과 비약도 볼 것이다. 말하자면 말 그대로 "완전히 먹어 치울 것"이다. 시지프 신화가 어려운 이유 먼저 카뮈에 대한 환상을 깨야 할 것 같다. 카뮈의 《시지프 신화》는 분명히 좋은 책이지만 논리적으로 무결한 철학 책은 아니다. 이건 단순히 젊은 스물아홉 살 청년이 쓴 에세이(시도)일 뿐이다. 카뮈는 본인 스스로가 철학자가 아니라고도 이야기하며, 독일 학계에서 그를 철학자로 분류하지 않는 경우들도 많다. 나는 철학자가 아니다. 나는 어떤 체계를 믿을 만큼 충분히 이성을 믿지 않는다. 나의 관심사는 모럴이다. - <출판 직후 인터뷰에서> 이 문장에서 이 책이 어려운 이유를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카뮈 사상의 핵심인 '부조리'는 이성으로 환원되는 어떤 '개념'이 아니라 '감정'이기 때문이다. '기쁨'이란 무엇인가를 아이에게 설명하려면 기뻤던 순간들에 느꼈던 감정들을 열거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카뮈는 책에서 '부조리의 감정'을 열거하기 때문에 글이 다소 추상적이고 모호하게 느껴진다. 이게 이 책이 어려운 첫 번째 이유다. 두 번째로 이 책은 많은 철학자를 동원해서 설명하기 때문에 어렵다. 키르케고르, 하이데거, 니체 등 많은 철학자의 개념을 인용하고 '이건 다 알지?' 하며 합의하고 넘어가는 뉘앙스라서, 인용된 학자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초심자들에게 이 책은 불친절할 것이다. 그리고 카뮈도 이를 잘 알고 있다. 다음의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금세기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것을 우리 눈으로 목도할 수 있는 어떤 부조리의 감성일 뿐,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 시대는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그 어떤 부조리의 철학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선 이 책이 우리 시대의 몇몇 탁월한 사상가들에게 빚지고 있는 바를 지적해두는 것은 기본적인 정직함에 속한다. - <시지프 신화> 13p 그러니 내가 다리를 놓을 곳은 두 군데이다. 추상적이고, 감정적인 것에 대한 논리적 주석 불친절하게 인용된 철학자들에 대한 부연 설명 부조리 철학 카뮈의 철학을 한 줄로 요약하면 '부조리 철학'이겠다. 카뮈 본인도 《시지프 신화》의 시작을 '부조리'로 삼았고, 《시지프 신화》의 원래 제목은 '부조리'였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부조리가 결론으로 간주 되어 왔지만 이 논고에서는 그것을 하나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점을 지적해 두는 것이 좋겠다. - <시지프 신화> 13P 부조리가 뭘까? 한국에서 '부조리'라는 단어를 듣는다면 군대의 부조리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부조리를 라틴어로 재번역하면 'absurdus'가 되는데, 이것은 '불협'이라는 단어로 많이 사용된다. 부조리를 한자어 그대로 보더라도 ...

[시리즈 연재] 9. 무의미한 삶과 자살 (알베르 카뮈)

(Édouard Manet - 자살) 최근에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으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이 책은 단순한 로맨스 소설로 읽힐 수도 있지만, 동시에 'survive(생존하다)'와 'live(살아가다)'의 차이를 성찰하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는 생각이다. 개인적으로 한국어 번역이 이 단어들의 미묘한 차이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고 느껴서, 영어 어원에 집중해 보면 그 차이가 더 선명해질지도 모르겠다. 'survive'는 라틴어 'supervivere'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원을 쪼개 보면 'super-(넘어서)'와 'vivere(살다)'가 합쳐진 형태이니, '죽음의 고비를 넘기다' 정도로 이해하면 어떨까? 실제로 <쇼미더머니> 같은 경쟁 프로그램이 'survival program'이지 'live program'이라 불리지 않으니 맞는 말일 것이다. 'live'의 기원은 더 복잡한데, 인도유럽조어의 뿌리인 'leip'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흥미롭게도 이 어근은 '살다'라는 뜻 이전에 '남겨지다'라는 의미를 품고 있었다. 제미나이에게 직관적인 설명을 요청해 보니, 'live'와 'leave(남기다)'가 어원적으로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지점에서 'survive'와 'live'의 차이는 분명해진다. 'survive'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길 요구하는 역동적인 '동사'라면, 'live'는 존재 그 자체로 머무르는 '형용사'적 상태에 가깝다는 점이다. 내가 이 미묘한 차이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이것이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본질적인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남자 주인공인 시몽이 여자 주인공 폴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이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그 대신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 시몽이 보기에 폴은 고독한 사람이다. 왜?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의무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다. 이 책은 1959년 프랑스에서 쓰인 작품이지만 2026년 한국을 정확하게 관통한다. 자주 언급되듯이 현대인들은 고독하다. 사강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사랑을 지나치고 행복을 소홀히 했기에 고독이라는 벌을 받은 것이다.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사랑과 행복 대신 핑계와 편법, 그리고 체념을 선택하며 살아간다. "대학교만 가면", "취직만 하면", "집만 사면", "결혼만 하면", "아이만 낳으면" 같은 핑계와 체념이 우리의 행복과 사랑을 자꾸만 뒤로 미루게 만든다. 말하자면 우리의 삶은 'survive' 하며 나이에 맞는 허들을 뛰어넘는 과정일 뿐, 제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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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연재] 8. 나? (김춘수)

(M.C. Escher - Encounter) 김혜순, 윤동주, 박준의 시 세계를 넘나들며 7주에 걸쳐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분간 사랑에 관해서는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없을 듯하다. (아마?) 그동안의 글에 귀 기울여 준 독자라면, 내가 다룬 '사랑'이 단순히 연인 간의 감정이라는 미시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나아가 이성 중심의 '통일성'에 대한 비판과 그로부터 파생된 전쟁, 사회문화라는 거시적 차원까지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조명해 보았음을 알 것이다. 내가 해석한 시편들을 통해, 비통일성으로서의 '사랑'이라는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수많은 시인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세상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려 했는지 그 노력이 전해졌기를 바란다. 앞으로 사랑이라는 주제가 다시 등장할지도 모르겠지만, 오늘은 시선을 돌려 한층 폭넓고 다채로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당분간 몇 주에 걸쳐서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 깊이 탐구해 보자. 게이치로 : 나란 무엇인가? 오늘은 일본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가 던진 흥미로운 통찰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예전에 그의 소설 <한 남자>를 무척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다. 주제가 재밌어서 그런데 스토리를 우선 설명해야겠다. 소설 속 '리에'라는 인물은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잃는데, 장례식장에서 남편의 이름과 과거가 모두 거짓이었다는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한다. 리에는 변호사 '키도'에게 남편의 진짜 정체를 의뢰하고, 자신에게 한없이 다정했던 남편이 사실은 살인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작품은 이 서사를 통해 오늘의 주제가 되는 질문을 던진다. '나를 구성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 물음에 매료되어 나는 그의 산문집 <나란 무엇인가>를 연이어 펼쳤고, 그곳에서 저자의 더 구체적인 사유를 엿볼 수 있었다. 저자의 말을 빌리면 나 개인이 아니라 분인이다. 그러니까 언어적으로 접근해 보면 개인(個人)은 '낱 개'를 쓰고 분인(分人)은 '나눌 분'을 쓴다. 전통적으로 사람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최소 단위였다. 낱 개를 쓰기 때문에 사람 한 명, 한 명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게이치로는 사람을 '분인'이라면서 나눌 수 있다고 봤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우리는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마다 그 사람 앞에서만 발현되는 '패턴'이 존재한다. 가령 군대에서 시작된 관계라면 사회에서 행동과 습관에서 계급적인 커뮤니케이션이 튀어나오고, 의사와 환자로 시작된 관계라면 행동과 습관에서 돌봄과 돌봐짐의 커뮤니케이션이 튀어나오는 법이다. 오랜만에 만난 동네 친구들 앞에서의 나,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나, 강의실에서 수업에 집중하는 나. 우리는 상황과 대상에 맞춰 각기 다른 행동과 습관을 꺼내 입는다. 그리고 이 다양한 패턴, 즉 '분인'들의 총합이 비로소 '나'라는 존재를 완성한다. 다들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숙제를 하지 않아 불같이 화를 내시던 어머니가, 선생님의 전화 한 통에 언제 그랬냐는 듯 "네, 선생님" 하며 한없이 상냥해지는 순간 말이다. 만약 인간이 단일한 '개인'이라면 어머니의 이런 태도는 모순이자 가식일 뿐이다. 하지만 게이치로의 시각에서 이는 모순이 아니다. 그저 '어머니'가 아닌 '학부모'로서의 정체성, 즉 새로운 분인이 발현된 것일 뿐이다. 한 사람 안에 존재하지만 인격적으로 분리된 이 패턴들, 그렇기에 개인은 곧 분인이다. 게이치로의 대부분의 소설이 이런 '분인주의' 사고 위에서 이뤄진다. 위에서 언급했던 <한 남자> 라는 책도 결국에 살인자인 남편의 과거와 자상하고 사랑을 베풀던 남친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이냐, 그러니까 이 두가지 인격을 한 사람이 품을 수 있는 것이냐에 대한 의문으로 끝난다. 이것을 통찰하면 많은 것이 이해가 된다. '정'이란, 그리고 '사랑'이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친구나 연인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다. 어쩌면 우리는 상대방 자체를 사랑하는 것을 넘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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