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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연재] 15. 복숭아나무와 맥락 (나희덕)
life and market[2026 시리즈 연재]

[시리즈 연재] 15. 복숭아나무와 맥락 (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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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lo
2026.04.12조회수 12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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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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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구나..그렇다는 걸 나는 몰랐다. 나는 모르는 게 너무나도 많지만 어쩌자고 이런 것까지 모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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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ncent van Gogh - peach Tree in bloom)


폭력은 사랑의 반대다

저번 주를 포함하여 총 3주 동안 '폭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에서 주장하는 것이 시리즈 연재 초기에 이야기했던 '사랑'이라는 테마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도 눈치 빠른 독자라면 알아차렸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 이유는 폭력이 사랑의 반대말이기 때문이며, 폭력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면 그것은 곧이어 사랑에 대한 정의이기 때문이다. 지난주에 우리는 폭력에 대해서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라고 이야기했으니 반대로 사랑은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에서의 만족"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은 다르게 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극단의 논리로 편입하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인간의 대표적인 오류 중의 하나인 휴리스틱 편향을 생각해보면 인간은 시간과 정보가 제한된 상황에서 빠르고 효율적인 의사결정을 위해 사용하는 정신적 지름길(휴리스틱)이 체계적인 인지적 오류를 유발하는 현상이다.


그러니 시간이 지날수록 시간이 없어지는 현대인들이 자신의 관심 밖에 있는 문제들을 직관에 의존하여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하고 논리적 오류를 범하는 것은 과학적 사실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심리학적, 뇌과학적으로 폭력적이게 태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에 사랑은 우리의 본성을 반한다는 차원에서 '사랑은 노력'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맞는 말이며 동시에 더 많은 에너지를 쓴다는 차원에서 "사랑은 비효율을 감수하는 것(긍정적인 의미에서)"이라는 말은 나름 정확한 통찰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누군가를 정의하지 않고 타자로 두는 일, 말하자면 사랑하는 사람을 아토포스(정의되지 않음)적 타자로 두는 일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동일화의 욕망을 포기하는 일이다. 그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다름을 인정하는 일, 통일되는 원리를 포기하는 일이다.


카뮈의 말을 빌리면 무수한 조각으로 파열된 광채가 인식 앞에 나타나는 것이며 그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안겨 줄 친숙하고 고요한 표면을 재구성하는 것을 포기하는 일이다. 그런 불안정한 마음이 사랑이다.


사랑에 남겨진 사람들

사랑에 남겨진 사람들은 맥락에 남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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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연재] : 11. 우리는 왜 변해야할까?(릴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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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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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적으러 모든걸 사고하려하지 말고 중간에 위치한 부분들에 대해 이해하려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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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로잉
2026.04.14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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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lo
작성자
2026.04.14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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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oneer
2026.04.15

폭력성과 사랑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봤습니다. 내가 가진 폭력성은 그 표출을 절제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덕분에 이런 생각을 할 시간을 가졌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