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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연재] 17. 예술과 감염 (톨스토이)
life and market[2026 시리즈 연재]

[시리즈 연재] 17. 예술과 감염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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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lo
2026.04.26조회수 25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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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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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구나..그렇다는 걸 나는 몰랐다. 나는 모르는 게 너무나도 많지만 어쩌자고 이런 것까지 모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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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소개팅 자리에서 누군가 문학을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문학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이만큼 난처한 일이 없다. 사실 문학을 좋아할 수도 있고,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자리가 자리인지라 왠지 문학을 잘 모른다고 대답하면 은근히 실망한 눈빛에 자신이 교양없는 빈 껍데기인 사람처럼 느껴지고 부끄러워진다.


진지하게 인문학을 하는 입장으로서 이런 외재적인(행동이나 가치가 그 자체에서 비롯되지 않고, 보상, 처벌, 타인의 인정 등 외부 요인에 의해 유발되는 것을 의미) 동기로 인문학을 다루는걸 달가워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니 혹시 이렇게 부득이하게 아는 척을 해야하는 입장이라면 소위 꺼들먹 거리기로는 러시아 문학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난이도가 있는 만큼 그 깊이도 존재하는데 오늘 소개할 톨스토이와 도스예프스키의 작품이 그렇다. 19세기에 러시아는 두명의 천재를 낳고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이 두명의 천재, 달리 말하면 러시아 문학의 양대문호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 오늘 소개하고 싶은 작가는 톨스토이다.


글을 쓰기 전에 한가지 말 할 것은 그가 남긴 장편들은 모두 읽었지만 아직 중단편은 못 읽은게 많아서 그의 작품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 깊이 있는 해석을 전하기가 어렵다. 다만 오늘은 톨스토이의 저작인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기반으로 하여, 그가 어떤 예술을 추구하고자 했는지 설명하고 싶다. 많은 부분이 내 독자적인 해석이기 때문에 기존에 작성했던 시리즈와 겹치는 부분이 있음을 미리 일러둔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톨스토이는 본인의 저작 <예술이란 무엇인가>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예술에 대한 견해를 소개한 바 있다. 톨스토이는 예술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보다 과거, 현재의 예술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진정한 예술의 구성 요소로 '감염'을 언급하며 미래의 예술이 지향해야 하는 바를 드러낸다.


톨스토이는 <예술이란 무엇인가>에서 우리가 흔히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선배들과 작품들을 너무나도 쉽고 자신 있게 나쁜 예술이라고 단정한다. 음악에서는 벤토벤, 브람스 문학에서는 셰익스피어와 괴테 미술에서는 인상주의 화가들을 비판했는데 아무리 명성을 날리던 러시아의 대문호라도 이 비판의 근거가 타당한지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톨스토이는 예술이 단순히 미를 표현하는 데 머무르고 있다고 봤다. 톨스토이가 보기에 이러한 미는 개인의 정열과 욕망을 충족시키고 개인을 이기적이고 쾌락적인 상태에 머무르게 만든다고 봤다. 따라서 톨스토이에게 미는 사람 간의 결합을 방해하는 부정적인 요소인 것이다.


반대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톨스토이의 예술이 인간 간의 교류를 원활하게 하고, 공동체적인 가치를 촉구해야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톨스토이가 생각한 예술의 역할이다. 톨스토이는 이러한 예술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는 기준을 '감염' 이라는 개념으로 압축한다. 감염에 대해 그의 책에서 그대로 옮기면 "작가 자신이 어떤 감정을 나름대로 경험하여 이를 전할 때에만 얻어지는 것" 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두가지 질문이 따라오게 된다. 그가 말하는 '어떤 감정'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또한 어떠한 '방식'으로 전해야 하는가? 그의 예술에 대한 방법론과 목적론은 여기에서 파생된다. 다시 질문을 정리하자면 작가는 '어떤 방식' 으로 '어떤 감정' 을 전해야할까?


우선 톨스토이는 예술은 '진정성'이 내포된 방식으로 전해져야 한다고 봤다. 그렇기에 그는 경험하지 않은 감정들을 허위와 거짓으로 표현하는 것은 기만으로 인간의 단합을 가능하게 하는 진정성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이라고 봤다. 그래서 작가는 항상 자신이 경험한 감정을 예술을 통해 충실하게 전달해야한다고 봤다.


또한 톨스토이는 전달의 대상이 되는 감정으로 만인을 결합시키는 보편적인 두 가지 감정을 언급하는데 하나는 우리의 존재 근원이 동일하다는 차원에서의 종교적인 감정이고, 다른 하나는 기쁨과 슬픔같이 인류가 누구나 지니고 있는 감각에 대한 일상적인 감정이다. 정리하자면 톨스토이에게 감염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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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읽고 있는 중이라 톨스토이가 궁금했었는데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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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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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이 과소평가되는 요즘...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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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oneer
2026.04.29

톨스토이가 생각한 공감이 그의 예술관에서는 이런 것이었구나... 생각이 드는 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정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