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클이란 무엇인가
여러분, 혹시 '사이클 산업'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반도체, 석유화학, 조선... 이런 업종들을 부를 때 자주 등장하는 표현인데요. 마치 이 단어가 반도체나 석유라는 물질 자체에 내재된 어떤 숙명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반도체는 원래 그래", "조선업은 워낙 사이클이 심해서" 같은 말들을 무심코 받아들이게 되죠.
그런데 잠깐만요. 정말 그럴까요? 반도체라는 작은 실리콘 조각이, 혹은 거대한 배를 만드는 행위 자체가 본질적으로 롤러코스터 같은 수익 변동을 야기하는 걸까요? 아니면 우리가 뭔가 놓치고 있는 게 있는 걸까요?
하지만 진실은 조금 다릅니다. 사이클이 생기는 근본적인 이유는 단 하나,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수요와 공급을 제대로 모른다는 거죠. 만약 우리가 미래의 수요와 공급을 정확히 안다면? 사이클 같은 건 애초에 생길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 메모리가 얼마나 필요했을지, GPU가 얼마나 들어갈 지 미리 알았으면 어땠을까요? 이런 세상에서 지금같이 가격이 폭등했다 폭락하는 드라마가 펼쳐질 이유가 있을까요?

콜라먹는 하마 이야기
이해를 돕기 위해 좀 황당한 예시를 하나 들어볼게요. 제가 콜라를 정말... 정말 좋아한다고 상상해봅시다. 그냥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전 세계 콜라 소비의 상당 부분을 혼자 담당할 정도로 마셔대는 고래중의 고래, 콜라 하마입니다. 돈도 무지막지하게 많아서 계속 마실 수 있다고 해보죠.
콜라 회사 입장에서 저는 고래... 아니, 하마입니다.
1막: 인후통 파동
어느 해, 저에게 인후통이 생겼습니다. 자연스럽게 평소보다 콜라를 적게 마시게 되었죠. 콜라 회사는 이를 보고 큰 결단을 내립니다. 이것은 '구조적'인 악재라고요.
경영진 회의가 열립니다. CFO가 엑셀 차트를 띄우며 말합니다. "분기 매출이 30% 감소했습니다. 앞으로도 얼마 못마실겁니다. 이건 일시적 현상이 아닙니다. 구조적 변화입니다." CEO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머지않아 코카콜라와 펩시는 직원을 해고하고, 생산 라인을 감축하기 시작합니다. 공장 하나가 폐쇄됩니다. 협력업체들에게 발주량 감축을 통보합니다.
그런데... 제 인후통이 나았습니다. (당연하죠?)
다시 평소대로 콜라를 마시려는데, 마실 게 없습니다! 냉장고에 넣어뒀던 건 유통기한이 다 됐고, 새로 만들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공장을 다시 돌리려면 해고했던 직원들을 재채용해야 하고, 폐쇄했던 라인을 재가동해야 합니다. 이게 하루 이틀에 되는 일이 아니죠.
저는 어쩔 수 없이 중고나라와 당근마켓을 뒤지기 시작합니다. 천 원짜리 코카콜라 한 캔을 만 원 주고 사는 지경에 이르죠. 재고를 쌓아뒀던 똑똑한(?) 사람들이 갑자기 콜라 재벌이 됩니다. 중고 콜라 시장에 투기 광풍이 붑니다.
그래도 부족합니다. 평소 같으면 쳐다도 안 봤을 펩시를 사 마시기 시작하고, 급기야 이름도 모를 잡콜라들, 심지어 환타까지 닥치는 대로 사서 마십니다. 중독자의 비애입니다. 잡콜라 회사들은 갑자기 불어난 주문에 환호합니다. "드디어 우리 시대가 왔다!"
잡콜라 (예시)
코카콜라는 부랴부랴 공장을 확장하고 직원을 늘립니다. 해고했던 직원들을 다시 부르는데, 다들 이미 다른 직장을 구한 상태입니다. 할 수 없이 더 높은 급여를 제시하고 재영입합니다. 신규 장비도 급하게 발주합니다. 비용이 급증하죠.
얼마 지나지 않아 생산량이 늘어나고, 가격은 다시 정상화됩니다. 저는 당연히 코카콜라로 회귀하고요. 펩시는 타격을 입고, 잡콜라들은... 순간의 영광을 뒤로 한 채 시장에서 사라집니다. 그들의 야심찬 증설 계획도 물거품이 되어버립니다. 콜라 과점 체제가 더욱 공고해지고, 코카콜라는 생산 비용 증가를 반영해 가격을 슬쩍 올립니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사이클의 기본 모습입니다. 수요 급감 → 과도한 감축 → 수요 회복 → 공급 부족 → 가격 폭등 → 과도한 증설 → 공급 과잉 → 가격 폭락. 이 사이클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거죠.
2막: 당뇨 쇼크와 구원자의 등장
그렇게 콜라를 마시던 어느 날, 병원에서 당뇨 진단을 받습니다. 콜라를 못 마시게 된 겁니다. 의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합니다. "혈당 수치가 심각합니다. 앞으로는 단 거 못먹는다 이말입니다." 저는 멍하니 진료실을 나섭니다.
이 뉴스는 순식간에 시장을 뒤덮습니다. 병원 주차장에서 찍힌 제 사진이 주요 경제 신문 1면을 장식합니다. "OOO, 당뇨 진단... 콜라 산업 아마겟돈?" 펩시는 긴급 이사회를 소집하고 문 닫을 준비를 하기 시작합니다. 코카콜라도 공포에 휩싸입니다. 주가가 하루에 30% 폭락합니다. 애널리스트들이 일제히 목표주가를 하향 조정합니다.
다음 분기 실적 발표, 예상대로 엄청난 손실입니다. 제가 안마셨기 때문입니다. 컨퍼런스콜에서 CEO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합니다. "우리의 주요 소비자가... 건강상의 이유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합니다. 세상이 망할 것 같고, 콜라 산업은 붕괴 직전처럼 보입니다.
언론에서는 콜라 산업의 몰락을 기정사실화합니다. "콜라의 예견된 종말", "콜라 회사 구조조정 불가피", "협력업체 연쇄 부도 우려" 같은 기사들이 쏟아집니다. 유튜브에서는 이럴 줄 알았다는 사이버렉카가 출동합니다.
그런데.

어느 펩시 직원이 '제로슈거 라임'이라는 제품을 내놓습니다. 콜라이면서도 당뇨인 제가 마실 수 있는 제품이었죠. 사실 이 직원은 몇 년 전부터 이 아이디어를 제안해왔었는데, 계속 묵살당했었습니다. "콜라는 원래 설탕맛으로 마시고 하는 거야. 제로? 그게 무슨 콜라야?"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다릅니다. 회사가 망하기 직전이니까요. 급하면 뭐든 시도해보는 법입니다.
시제품을 받아본 저는... 놀랍게도 맛이 괜찮다고 느낍니다. (중요합니다) 물론 예전의 그 달콤한 맛과는 다릅니다. 하지만 콜라의 톡 쏘는 느낌, 시원한 청량감은 여전합니다. 무엇보다 이걸 마셔도 혈당이 오르지 않습니다.
저는 다시 예전만큼 콜라를... 아니, 제로콜라를 마시기 시작합니다. 시장은 급격히 안정을 되찾습니다. 펩시의 주가가 급등합니다. 며칠 만에 50% 상승합니다. 코카콜라도 황급히 자체 제로 제품을 출시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물론 시장의 주력이 제로콜라로 넘어갔고, 펩시는 난생처음 시장 1등의 자리에 오릅니다. 산업 전문지들이 특집 기사를 쏟아냅니다. "제로슈거 혁명", "펩시의 극적인 반전", "위기를 기회로 만든 혁신". 그 몇 년 전에 아이디어를 제안했던 직원은 임원으로 뒤늦게 승진하고 유퀴즈 같은 방송에도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게 사이클인가, 구조적 변화인가?
여기서 재미있는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시장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