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과 배신의 100년, 이란은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억압과 배신의 100년, 이란은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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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toman
2026.03.01조회수 319회

이란이 이슈가 된 김에 미리 짜두었던 것을 급하게 써봅니다.

월요일까지 쉬는 도중에 천천히 생각해볼 수 있는 요깃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이란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

美유학·미니스커트…이란도 그땐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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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1970년대 테헤란의 거리입니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들이 유럽풍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있고, 대학 캠퍼스의 강의실에는 남녀 학생이 나란히 앉아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2026년 1월의 테헤란 그랜드 바자르입니다. 셔터를 내린 상인들의 행렬, 거리를 가득 메운 시위대, 그리고 '하메네이에게 죽음을'이라고 외치는 구호. 정말 같은 나라인지 의심스러운 변화죠

이 변화는 1979년 이슬람 혁명 하나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혁명은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전 100년 동안 이란 시민들은 '위로부터의 강제'와 '밖으로부터의 배신'을 번갈아 경험하며, 자신들이 신뢰할 수 있는 권위를 단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국가가 근대화를 강요하면 외세가 그 국가를 갈아치웠고, 혁명으로 국가를 갈아치우면 혁명이 또 다른 강압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주말 사이에 천천히 살펴보시죠

1부: 카자르의 몰락과 레자 샤의 등장 (1900~1941)

Reza Shah Pahlavi의 이미지

"구원자"는 어떻게 독재자가 되는가

1900년대 초, 이란(당시 국호는 페르시아)을 통치하던 카자르 왕조는 사실상 이름뿐인 국가였습니다. 북쪽으로는 러시아, 남쪽으로는 영국이 석유와 교역로를 놓고 이란 땅을 분할 경영하다시피 했고, 왕실은 재정난을 메우기 위해 이권을 팔아넘기기 바빴습니다. 1906년 입헌혁명으로 의회(마즐리스)가 탄생하며 잠깐 희망이 보였지만, 외세의 간섭과 왕실의 방해 속에 의회는 유명무실해졌습니다. 이란이 1차 대전의 전쟁터로 유린당하고 기근과 전염병으로 수백만 명이 사망하는 동안, 카자르 왕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이 대목에서 묘한 데자뷰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같은 시기 조선 역시 청나라·러시아·일본 사이에서 똑같은 수난을 당하고 있었으니까요. 강대국의 각축장이 된 반도와 고원, 두 나라는 20세기를 비슷한 상처로 시작했습니다.

그 혼란이 키운 열망의 수혜자가 레자 칸이었습니다. 카자르 왕실 산하 코사크 여단의 장교 출신인 그는 1921년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하고, 1925년 스스로 왕위에 올라 팔라비 왕조를 열었습니다. '샤'는 이란의 왕좌를 뜻합니다. 왕이 된 레자 샤의 등장은 처음에는 기대를 받았습니다. 근대적 군대와 관료제를 세우고, 철도를 놓고, 여성 교육을 장려하는 그를 두고 사람들은 '드디어 나라다운 나라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방법이, 어쩌면 시대가 문제였습니다.

레자 샤의 근대화는 설득이 아니라 강제였습니다. 복장·의례·종교 전반에 국가가 개입하여 '새 이란인'을 주조하려 했고, 1936년에는 히잡과 차도르 착용을 전면 금지했습니다. '강제 탈베일(카쉬프-에 헤자브)'이라 부르는 이 조치의 집행 과정에서 일제시대의 단발령을 방불케하는 강제적 조치가 행해졌습니다. 히잡을 쓰고다니는 여성은 길거리에서 히잡을 찢기고 폭행당하기도 했으며, 이 장면은 훗날 이슬람 공화국의 '강제 히잡'과 정확히 거울상을 이룹니다. 한쪽은 벗기겠다고 강제하고, 다른 한쪽은 쓰라고 강제합니다. 이란의 많은 가족사에서 히잡은 신앙의 문제이기 이전에 '국가가 내 몸을 지배한 기억'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세대를 건너 전해졌습니다.

레자 샤는 2차 대전기에 중립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연합국(영국·소련)은 보급로 확보를 이유로 이란에 진주하고 그를 강제로 퇴위시켰습니다. 근대 국가를 만들겠다고 내부를 강압했더니, 외부가 그 국가 자체를 갈아치워버린 것입니다. '이란은 강대국의 장난감'이라는 냉소가 사회 깊숙이 박혔습니다. 축출 이후 아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가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국가의 주권이 외부에 의해 어이없이 교체되는 장면을 지켜본 이란인들의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2부: 민주주의가 민주 국가에 의해 박살나다 (1941~1963)

모사데크, 그리고 1953년의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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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라비 왕조 초기, 이란 의회는 완전히 무력하지 않았습니다. 모하마드 모사데크는 테헤란 명문가 출신의 법학자로, 귀족 배경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입헌주의와 의회 주권을 주장해온 인물이었습니다. 1951년 총리에 취임한 그는 이란 현대사에서 가장 극적인 카드를 꺼냅니다. 석유 국유화입니다. 당시 이란 석유 수익의 대부분은 영국 회사인 앵글로-이라니안 오일(훗날의 BP)이 가져갔습니다. 모사데크는 '이란의 석유는 이란 것'이라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논리로 대중을 결집시켰고, 국유화를 단행했습니다. 의회에 대한 지지는 어느 때보다 높았고, 제국주의 시절 수탈당한 국가적 자원을 되찾을 수 있는 이 순간이, 이란 역사에서 민주주의가 가장 가까이 손에 닿을 것 같았던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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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순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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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to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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