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어제의 은, 오늘의 은 (上)

중국, 어제의 은, 오늘의 은 (上)

avatar
Ottoman
2026.02.23조회수 200회
최고 소장가치의 명, 청나라 보물(2)-중국국제방송 문화교육채널


미리 시리즈 연재를 보고 오시면 도움이 됩니다!


인류 최초의 신용화폐 실험, 그리고 실패

송(宋)이 몽골에 밀려 망하면서 중국 대륙은 또 한 번 이민족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송이 세상에 남긴 것은 단순한 문물이 아니었습니다. 인류 최초의 본격적인 신용화폐 실험, 즉 "이 종이 자체는 아무 가치가 없지만 국가가 보증하겠다"는 혁명적인 아이디어가 그것입니다. 몽골의 원(元)은 이 아이디어를 이어받아 한술 더 떠 귀금속 거래를 아예 통제하고 지폐만 쓰도록 강제했습니다. 방향만 보면 꽤 그럴듯했습니다.

문제는 몽골인들이 시장에서는 철저한 자유주의자였다는 것입니다. 좋게 말해 자유였지, 실상은 방임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중화 문명이 황제에게 요구하는 '덕(德)'도, 화폐를 다루는 절제도 없었습니다. 결국 재정이 흔들리자 원의 지배층은 가장 쉬운 유혹에 빠졌습니다. 금화나 은화는 광산을 파야 더 만들 수 있지만, 종이는 찍으면 그만이었으니까요. 로마 말기에도, 훗날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했던 그 유혹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 유혹을 이겨낸 정권은 많지 않습니다. 아주 익숙한, 전대미문의 인플레이션이 덮치고, 자연재해로 농업 기반까지 무너지자 중국 특유의 민란이 사방에서 터졌습니다. 거기다 몽골 지배층끼리 내전까지 벌이니, 제국 경영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이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복합적인 재앙이었습니다.

이 난장판 속에 주원장이 등장합니다. 문자 그대로 거리를 떠돌던 거지, 탁발승 출신의 그는 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입지전적인 성과를 냅니다. 몽골을 몰아내고 명(明)의 시조가 됩니다. 거지가 통일 중국의 황제가 된 것입니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지폐의 가능성만큼은 알아봤는지 명 초에도 국가 보증 지폐인 대명보초(大明寶鈔)를 발행하며 실험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같았습니다. 고질적인 위조 문제와 화폐 가치의 지속적 하락을 당시 기술로는 도저히 막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수백 년에 걸친 지폐 실험은 그렇게 막을 내리고, 중국은 다시 귀금속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세금은 이제 돈으로만 받겠습니다..?

지폐가 사라졌다고 경제가 쪼그라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송 대에 이미 엄청난 규모로 팽창한 중국 경제는 명·청을 거치며 계속 커졌고, 장거리 교역과 전문 상인, 도시 노동자와 대규모 시장이 형성되며 결제 수단에 대한 수요는 더욱 커졌습니다. 소액은 구리동전으로, 고액은 은괴, 즉 은량(銀兩)으로 거래되었으니 마치 지금의 동전과 지폐의 관계와 흡사합니다. 지금 중동 산유국이 한국 선사에 석유를 팔 때 달러로 결제하듯, 당시 중국의 원거리 교역에서 기축통화는 은이었습니다. 은의 수요는 중국 경제의 성장과 함께 구조적으로 성장했죠.

그런데 16세기, 임진왜란 전후 시기에 명의 재상 장거정(張居正)이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립니다. 일조편법(一條鞭法), 일조는 한 줄이란 뜻입니다. 말 그대로 "모든 세금을 한 줄로 묶어 앞으로는 은으로만 내라"는 조세 개혁입니다. 지금 기준으로는 너무나 당연한 소리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세금은 종류가 여럿이었습니다. 쌀로도 내고, 특산품으로도 내고, 우리의 몸으로 때우는 노동력으로도 냈습니다.부역(賦役)으로도 세금 내던 시절이었습니다. '홍시'로 세금을 납부해야 ...

회원가입만 해도
이 글을 무료로 읽을 수 있어요.

이미 계정이 있으신가요?로그인하기
댓글 7
avatar
Ottoman
구독자 603명구독중 23명
다양한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쓰는게 목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