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맥도날드 좋아하시나요? 요즘 맥도날드 버거를 좋아한다고 하는 사람은 드물죠. 미국에서는 이미지가 더 심각하죠. 하지만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맥도날드는.. 글쎄요, 어린 학생들에겐 성공의 상징이었습니다. 거기서 점심 먹는게 적어도 시골에서 자란 저에게는 아주 기억에 남는 추억이 되었죠. 워렌 버핏은 아직도 매일 아침 맥도날드를 먹는다고 하는데요. 재미로 보시죠.

공식적으로 맥도날드의 창업자는 맥도날드가 아닙니다. 위 사진의 레이 크록(Ray Kroc, 1902~1984)이죠. 그의 이야기는 미국 자본주의 신화의 가장 모순적인 사례 중 하나입니다. 표면적으로는 "52세에 인생 역전한 인간승리"의 영웅담이지만, 한 꺼풀 들춰 보면 "남의 사업을 가로챈 영업사원"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두 서사가 모두 사실이라는 점입니다.
레이먼드 알버트 크록은 1902년 10월 5일 시카고 외곽 오크파크(Oak Park, Illinois)에서 체코계 이민자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성이 특이한 이유가 그것 때문이죠. 아버지 루이스 크록은 철도로 유명한 웨스턴 유니언(Western Union)의 평범한 직원이었고, 1920년대 후반 부동산 투기에 손을 댔다가 1929년 대공황으로 전 재산을 잃고 1930년에 쓰러져 사망했습니다. 책상 위에는 봉급 명세서와 빚 독촉장 한 장이 놓여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장면은 어린 레이 크록의 머릿속에 평생 각인됩니다. 그가 훗날 사업을 부동산 자산화한 데에는 이 유년기의 트라우마가 깔려 있다고 보는 전기 작가들이 많습니다.
크록 자신도 학교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만 15세였던 그는 나이를 속이고 적십자(Red Cross) 구급차 운전병으로 자원입대합니다. 사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디테일이 하나 있는데, 같은 운전병 코네티컷 훈련소 동기 중에 또 다른 15세 소년이 있었습니다. 바로 월트 디즈니(Walt Disney)였습니다. 두 사람이 그 시기에 친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훗날 미국 문화의 거대한 상징을 양분하게 되는 두 인물이 십대 시절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사실은 재미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크록은 30년 가까이 "어중간한 세일즈맨"으로 살아갑니다. 종이컵 회사 릴리튤립(Lily Tulip Cup)에서 17년간 영업사원으로 일했고, 밤에는 시카고의 클럽에서 피아노 반주자로 부업을 했습니다. 라디오 방송국에서 음악 감독을 잠깐 한 적도 있고, 플로리다에서 부동산 사기에 가까운 토지 분양 영업도 했다가 빈털터리로 시카고에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결혼 생활은 불안정했고, 첫 번째 부인인 애설과는 그렇게 좋은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흔한 가정이었죠.
전환점은 1939년에 찾아옵니다. 얼 프린스(Earl Prince)라는 발명가가 만든 '멀티믹서(Multimixer)'라는 기계, 한 번에 밀크셰이크 다섯 잔을 동시에 만드는 5축 믹서에 크록이 매료됐고, 그 독점 판매권을 따냅니다. 이때부터 그는 미국 전역의 드러그스토어와 다이너(diner)를 돌아다니며 멀티믹서를 팔게 됩니다. 역시 좋은 사업은 아니었습니다. 2차 대전이 터지면서 모든 물자가 군수물자 우선으로 재배치되면서, 금속을 미국에서도 배급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생산이 끊겼습니다. 전후에는 레스토랑들이 셰이크보다 소프트아이스크림으로 옮겨 가면서 매출이 추락했습니다. 저도 아이스크림이 더 좋습니다.
1954년, 크록은 52세였고, 당뇨와 관절염을 앓고 있었으며, 갑상선 일부와 담낭을 떼어낸 상태였습니다. 미국 서민의 기준으로도 크록은 성공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거의 끝을 향해 가는 것처럼 보였죠.
그러던 어느 날, 캘리포니아 샌버나디노(San Bernardino)에 있는 작은 햄버거 가게가 멀티믹서를 한꺼번에 여덟 대나 주문했다는 소식을 받습니다. 한 매장에서 동시에 40잔의 셰이크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크록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 직접 비행기를 타고 서부로 날아갑니다. 1954년의 일이었고, 이 결정이 그의 인생을 바꿉니다.
크록이 도착한 곳에서 그는 미국 외식산업의 미래를 처음 목격합니다. 샌버나디노의 옥타곤형 매장 앞에는 점심시간마다 차가 줄지어 섰고, 종업원들은 마치 자동차 조립 라인처럼 햄버거를 찍어 내고 있었습니다. 메뉴는 9가지뿐이었고, 햄버거 15센트, 감자튀김 10센트, 셰이크 20센트라는 단순한 가격 구조였습니다. 식기는 모두 종이와 일회용이었고, 손님은 차에서 내려 직접 주문하고 받아 갔습니다.

이 가게의 주인은 형 모리스(Maurice "Mac")와 동생 리처드(Richard "Dick") 맥도날드 형제였습니다. 뉴햄프셔에서 캘리포니아로 건너와 영화 산업에서 잡일을 하다가 1940년에 핫도그·바비큐 가게로 시작한 형제는 1948년에 가게 문을 석 달 닫고 모든 것을 다시 설계했습니다. 메뉴를 줄이고, 식기를 종이로 바꾸고, 주방을 분초 단위로 동선이 짜인 '스피디 서비스 시스템(Speedee Service System)'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디테일인데, 형제는 가게를 다시 설계하기 위해 매장 뒤편 테니스 코트에 분필로 1:1 크기의 주방 평면도를 그려 놓고, 직원들에게 가짜 햄버거를 만들게 하면서 동선을 수십 번 수정했습니다. 이것이 사실상 패스트푸드 산업의 탄생 순간입니다. 나중에 유명한 드라마 '베터 콜 사울'에서 이 장면이 패러디되죠. (가게를 털려고 동선 연습하는 장면으로..)
크록은 이 시스템을 보고 즉시 깨닫습니다. "이거 된다" 형제는 이미 캘리포니아·애리조나 등에 몇 개의 프랜차이즈를 팔아 본 적이 있었지만, 의지가 약했습니다. 형 맥은 건강이 안 좋았고, 동생 딕은 보수적이었으며, 두 형제 모두 골프와 여유로운 캘리포니아의 삶을 사랑했습니다. 더 크게 키울 동기가 없었습니다. 크록은 자신을 전국 프랜차이즈 에이전트로 임명해 달라고 제안했고, 형제는 동의했습니다.
이 계약이 훗날 분쟁의 씨앗이 됩니다. 가맹점주는 가맹비 950달러(당시 기준으로 결코 비싸지 않은 금액)를 내고, 매출의 1.9%를 본사에 지불하는데 그중 0.5%가 맥도날드 형제 몫이고 1.4%가 크록 몫이었습니다. 더 결정적이었던 조건은 크록이 형제의 서면 동의 없이는 어떤 사소한 변경도 할 수 없다는 조항이었습니다. 형제는 자신들의 시스템이 망가지는 것을 두려워했고, 크록은 일단 먼저 계약부터 하고 나머지는 차차 고쳐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1955년 4월 15일, 크록은 일리노이주 데스플레인즈(Des Plaines)에 자신의 첫 매장을 엽니다. 같은 해 그는 'McDonald's System, Inc.'(나중에 ...

참 재미나게 본 영화였는데 글로 읽으니 더 정리되서 들어오네요. 뭐랄까 특히 끝날때까지 끝난게 아니다라는 마인드로 보니 더 새롭게 다가오네요. (전 영화 내내 좀 얄미웠습니다 ㅋㅋㅋ)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
여담인데 월트 디즈니와 크룩과 비슷한 사례로 비트겐슈타인과 아돌프 히틀러가 유년기 같은 학교에 다니던 썰이 있더라죠ㅎㅎㅎ

아돌프군은 어려서도 싹이 보이는 관상..이네요
농담입니다.
감사합니다!!

파운더 재밌게 봤었는데 오랜만에 다시 보고싶어지는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영화는 정말 재밌었죠 ! 영화인이상 사람에 대한 미화가 있지만요

역시 재밌는 글입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너무 재밌습니다!
감사해요!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

감사합니다!!

글을 정말 잘쓰세요 술술읽힙니다




![책을 읽고, [부동산은 어떻게 권력이 되었나]](https://shopping-phinf.pstatic.net/main_5848905/58489051285.20260114094927.jpg?type=w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