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주식쟁이들 사이에서는 부동산 자금이 주식으로 '머니무브'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간혹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부에서는 이를 생산적 금융이라고 부르고, 속된 말로는 집팔아서 주식산다고 하죠. 하지만 저는 단호하게 그런 현상은 없다고 단언합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소위 세간에서 말하는 '제대로 된 사람'들은 주식을 팔아 부동산을 사지 그 반대가 아닙니다.
한국에서 주식과 부동산은 일반인들에게 같은 '재테크'라는 단어 아래 살지만, 신분이 다릅니다. 주식은 코스피가 8,000을 찍어도 '도박'에서 '승률 높은 도박'으로 승진할 뿐, 격은 끝내 도박입니다. 10억어치 주식을 샀다고 하면 위험하다는 걱정을 듣지만, 10억어치 아파트를 샀다고 하면 부럽다는 인사를 듣습니다. 같은 돈이고, 레버리지까지 감안하면 어느 쪽이 더 위험한지는 계산해 봐야 아는 문제인데도 그렇습니다. 주식으로 10억을 번 사람에게 한국인은 "운이 좋았다"고 말하고, 아파트로 10억을 번 사람에게는 "보는 눈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쓰는 언어가 먼저 차별합니다. 주식은 '산다'고 하지만 집은 '마련한다'고 합니다. 마련과 장만은 김장과 혼수에 쓰는 동사, 그러니까 투자가 아니라 생존의 채비에 쓰는 말입니다. 한국어는 이미 오래전에 집을 자산의 범주가 아니라 쌀과 연탄의 범주에 넣어두었습니다. 숫자는 언어를 따릅니다. 2025년 기준 한국 가구의 평균 자산 5억 6,678만 원 가운데 4억 2,988만 원, 75.8%가 실물자산입니다. 한국의 평균적인 가계는 전 재산의 4분의 3을 부동산이라는 단일 자산군에, 그리고 많은 경우 단 한 채에 걸고 있습니다. 어떤 펀드매니저가 이런 포트폴리오를 들고 오면 해고감입니다. 그런데 오천만 명이 이렇게 삽니다.
"집은 사는(買) 것이 아니라 사는(住) 곳입니다." 정부와 공익광고가 수십 년 동안 반복해 온 표어입니다. 재밌는 것은 중국에서도 똑같은 표현을 쓰더군요. 이 문장이 한국에서는 단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나라에서 집이 무엇인지를 가장 정확하게 증언합니다.
왜 그럴까요. 흔한 답들이 있습니다. 국토가 좁아서. 농경 문명의 토지 애착 때문에. 압축 성장기에 벼락같은 지가 상승을 목격해서. 전부 조금씩 맞고, 전부 결정적으로 부족합니다. 국토가 좁은 나라는 한국만이 아니고, 땅을 사랑한 농경 문명은 지구의 절반이었으며, 압축 성장은 대만도 했습니다. 그 어디에도 전 재산의 4분의 3과 결혼 제도와 명절의 대화 주제와 계급 감각 전부를 부동산에 위탁한 사회는 없습니다.
한국인에게 부동산은 자산(asset)이 아닙니다. 채권(claim)입니다. 채무자는 국가입니다. 한국의 국가는 많은 약속을 어겨왔습니다. 민주주의를 거부했고, 복지를 미뤘고, 노동의 몫을 깎았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의 빚, 주거 불만이라는 빚만은 반세기 동안 한 번도 연체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인이 부동산을 믿는 것은 땅을 믿어서가 아니라 이 채무자의 변제 이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신앙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신용 분석입니다.
모든 채권에는 계약서가 있고, 이 계약서는 1971년 8월 10일 체결자입니다. 장소는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전라도의 광주가 아닙니다. 지금의 성남시, 그 무렵에는 지도에 이름조차 또렷하지 않던 황무지였습니다.
채권은 채무자가 돈을 빌리는 순간 태어납니다. 1971년의 국가는 빈민에게서 무엇을 빌렸을까요.
이야기는 농촌에서 시작됩니다. 1960년대의 저곡가 정책은 공업화의 연료였고 농촌 경제의 동결액이었습니다. 그 10년 동안 약 400만 명이 농촌을 떠났습니다. 1966년부터 1970년 사이에는 해마다 60만 명씩이었습니다. 갈 곳은 서울뿐이었고, 서울에 그들의 자리는 없었습니다. 청계천변과 중랑천변, 산비탈마다 판잣집이 들어섰습니다. 1967년 서울시가 헤아린 무허가 주택은 23만 3천 동, 그 안에 127만 명이 살았습니다. 당시 서울 인구의 3분의 1에 가까운 사람들이, 행정 서류상 존재해서는 안 되는 집에 살고 있었던 셈입니다.
당시는 박정희 정권 치하로,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해 대부분의 사업을 군사작전 식으로 속공을 벌이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주민대책에 대한 서울시의 해법은 단순했습니다. 밀고, 짓고, 올려보낸다. 서울시는 판자촌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시민아파트를 세우는 속도전을 벌였습니다. 그렇게 지어진 주택이 와우아파트입니다. 준공 7개월만에 입주를 하게 된 이 초속공 아파트는 입주민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균열을 발견하고 당국에 신고했습니다. 그러나 서울시 공무원들은 이를 보고서도 별 문제 없다고 그냥 돌아갔죠. 그리고 불과 2개월 후, 1970년 4월 와우아파트가 준공 넉 달 만에 동 전체가 통째로 무너져 33명이 깔려 죽는 대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시민아파트 노선이 좌절되자 행정의 논리는 한 단계 더 단순해졌습니다. 서울 안에 수용할 수 없다면, 서울 밖으로 내보낸다.
그렇게 나온 것이 1968년 발표된 광주대단지 계획입니다.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의 구릉지에 인구 50만의 위성도시를 세우고 서울의 철거민을 이주시킨다는 청사진이었습니다. 인구 50만이면 당시 웬만한 광역 도시와 맞먹는 규모입니다. 그 도시를 세우는 데 필요한 예산은, 책정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방침이 하나 있었습니다. '선(先) 입주, 후(後) 건설.' 도시는 나중에 짓고, 사람부터 실어다 놓는다는 원칙이었습니다.

1969년 5월, 첫 트럭들이 도착했습니다. 풍경은 어디서나 비슷했습니다. 새벽에 철거반이 들이닥쳐 판잣집의 지붕부터 걷어내면, 식구들은 황급히 이불과 솥과 문짝을 챙겼고, 사람과 세간이 한 덩어리로 군용 트럭 적재함에 실렸습니다. 트럭은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달려, 남한산성 아래 황톳빛 구릉지에 짐을 부리듯 사람들을 부려놓고 떠났습니다. 그곳에는 도시가 없었습니다. 도시를 약속하는 말뚝과 새끼줄이 있었을 뿐입니다. 측량 말뚝 사이에 군용 천막이 줄지어 섰고, 한 장의 천막에 너덧 가구가 들었습니다. 수도가 없어 물은 우물과 개울에서 길어 와야 했고, 변소가 없어 언덕이 변소가 되었으며, 전기가 없어 해가 지면 수만 명의 거처가 통째로 어둠에 잠겼습니다. 비가 오면 천막 바닥으로 황톳물이 흘렀고, 마른 날에는 흙먼지가 끼니 위에 앉았습니다. 사람들은 흙벽돌을 찍어 집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도시가 사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맨손으로 도시를 짓기 시작한 것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일자리였습니다. 단지 안에는 공장도 상가도 없었고, 서울로 나가는 버스는 드물고 멀었습니다. 서울의 판자촌에서는 그래도 지게를 지든 행상을 하든 날품을 팔아 그날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이곳에는 팔 날품조차 없었습니다. 굶는 집이 늘었습니다. 일대에는 굶주림에 지쳐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인육사건에 대한 흉흉한 소문까지 돌았습니다.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그런 소문이 돌고 또 믿겼다는 것 자체가, 이 단지의 공기가 어디까지 내려가 있었는지를 증언합니다. 난쏘공,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유명한 소설이 이 시절의 광주대단지를 소설의 무대로 삼았죠.
국가가 철거민에게 건넨 것은 집이 아니었습니다. 20평 안팎의 땅에 대한 입주권, 속칭 '딱지'였습니다. 딱지는 종이입니다. 그러나 그 종이에는 약속이 적혀 있었습니다. 싼값에, 평당 2천 원 안팎으로, 이 땅을 너희에게 불하하겠다는 약속. 요컨대 국가가 발행한 약속어음이었습니다. 빈민들은 집과 삶의 터전을 내주고 그 어음을 받았습니다. 국가는 도시화의 비용을 가장 가난한 채권자들에게서 외상으로 조달한 것입니다.
어음의 가격은 곧 국가 자신의 손으로 부풀려졌습니다. 1971년은 선거의 해였습니다. 4월에 대통령 선거, 5월에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습니다. 여당 후보 차지철은 유세에서 토지 무상 불하와 세금 면제, 대형 공장 유치를 약속하며 광주대단지를 '지상낙원'으로 만들겠다고 외쳤습니다. 행정도 분주했습니다. 어제는 공업단지 기공식, 오늘은 상수도 통수식, 내일은 도로 준공식이었습니다. 개발 정보를 먼저 쥔 투기꾼들이 딱지를 사 모으기 시작했고, 땅값은 치솟았습니다. 당장 굶는 철거민들은 딱지를 헐값에 넘기고 서울의 무허가촌으로 되돌아갔으며, 그 자리는 싼값에 내 집을 마련하려는 일반 전입자들이 채웠습니다. 시장이 만들어지고, 가격이 뛰고, 손바뀜이 일어났습니다. 정부 수립 이래 최초의 신도시 분양권 시장이, 국가의 주도로, 굶주린 사람들의 손 위에서 개장한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한국 부동산사의 첫 번째 교훈이 새겨집니다. 토지의 가치는 노동이 아니라 국가의 지정(指定)이 만들며, 그 지정에 가까이 선 자가 부를 가져간다는 것. 한국인이 받은 첫 부동산 교육의 교사는 국가였습니다. 국가는 한국 최초의, 그리고 최대의 투기꾼이었습니다.
선거가 끝나자 ...






오늘도 푹 빠져서 잘 읽다 갑니다.
부동산 쏠림에 이런 뼈대가 있었다니..!

감사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정말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내집 마련은 언제가능할지..

ㅠㅠ 감사합니다!

흡입력 미쵸따! 덕분에 잘 몰랐던 역사의 한 부분을 훑어내려갔습니다.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매 번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항상 감사합니다!

건강 챙기시기 바랍니다. 칼럼 오래 써주셔야 하니 ㅎㅎ
오늘도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따뜻한 답글 감사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부동산, 금융관련 현업에 종사하는데, 보통 집 포함 부동산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는 사람은 투기꾼이나 다주택자라고 합니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부동산과 이익에 제일 민감한 투기꾼과 다주택자들의 움직임이 재미있습니다. 저 사람들이야 기본적으로 돈이 많으니, 포트폴리오도 다양합니다. 그런데 최근에 저 사람들이 부동산의 비중을 줄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 상업용, 주거용 부동산 거래량도 줄어듭니다. 여러개 있는 사람도 괜찮은거 한두개로 포지션 조정이 일어나니 매도수요는 있지만 매수 수요는 많이 없어요.
무주택인 사람들은 1채에 대한 수요가 당연히 있으나, 실제 부동산으로 돈 많이 번 사람들은 수익실현의 시점으로 많이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부동산 재벌들인 롯데나 이마트도 최근 부동산에 대해서 수익실현을 해나가는중이더라구요. 저도 부동산이 단기적으로는 주식시장이랑 전닉 성과급 공급제한 등으로 급등할것같은데 장기적으로는 금리제약등 좀 힘들듯합니다.

예측에 관한 글이 아닌데 제가 쓰는게 형편없어 그렇게 보였나봅니다 ㅠ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오또맘님 글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