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 존재들의 세계에서 전략이란 무엇인가
Introduction
시장에는 두 종류의 회사가 있다. 시장의 룰을 따르는 회사, 그리고 시장의 룰을 다시 쓰는 회사. 이 시리즈는 후자에 대한 이야기다.
최근에 노팬티님께서 흥미로운 글을 올려주셨습니다. 재밌는 건, 저도 최근의 팔란티어를 보면서 했던 생각과 비슷하다는 점이었습니다. 팔란티어에 대한 매수/매도 의견은 아니지만, 요즘 공부 중인 게임이론의 관점에서 팔란티어를 바라보면 흥미롭겠다 싶어 마침 글을 쓰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이번 시리즈(3부작)에서는 부족한 점이 많을 거고, 게임이론의 특성상 머리가 좀 아플 수 있습니다. 다만, 기업을 이렇게도 바라볼 수 있구나 정도로 봐주시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할 것 같습니다. 자, 그러면 시작하겠습니다.
1519년, 멕시코 해안
에르난 코르테스는 500명의 병사와 13필의 말, 소수의 대포를 이끌고 신대륙에 상륙했다. 맞은편에는 수만 명의 아즈텍 전사가 있었다. 수적으로 100대 1의 열세. 전통적인 군사 이론이라면 후퇴를 권했을 상황이다.

100대 1을 뒤집은 한 결단의 출발
그런데 코르테스는 정반대의 결정을 내렸다. 반란을 도모하던 부하들이 배 한 척을 탈취해 쿠바로 돌아가려 하자, 코르테스는 자신들이 타고 온 배를 전부 좌초시켜버렸다.
퇴로가 사라졌다. 병사들은 이제 이기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런데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코르테스는 내륙으로 진군하면서 토토낙족, 틀라스칼라족 등 아즈텍의 지배를 받던 부족들과 동맹을 맺기 시작했다. '스페인인들은 후퇴할 수 없다'라는 사실이 퍼지자, 원주민 부족 중 일부가 코르테스 쪽에 붙은 것이다. 그리고 결국 코르테스는 이겼다.
선택지를 스스로 없앰으로써 이긴 것이다.
이것이 게임이론이 다루는 세계의 첫 번째 문이다.
첫 번째 문이란
대부분의 사람은 세계를 이렇게 이해한다. "나에게 선택지가 많을수록 유리하다. 힘이 셀수록 이긴다. 자원이 많을수록 우위에 선다."
이 직관은 어린 시절부터 학습된다. 시험에서 틀린 답이 많을수록 등수가 밀리고, 협상에선 카드를 더 많이 가진 쪽이 이긴다. 그렇게 점점, 세상은 자원의 게임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자원 배분의 효율성에 익숙한 우리 (출처: Britannica)
그런데 코르테스의 이야기는 이 직관을 산산조각낸다. 그는 자원을 더 얻어서 이긴 게 아니라, 자원을 버려서 이겼다. 이것이 왜 가능했을까? 한 가지 이유다. 상대가 내 행동을 예측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 나 혼자만 있다면 선택지는 많을수록 좋다. 최적화 문제에서는 제약이 적을수록 더 나은 해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상대가 존재하는 순간 규칙이 뒤집힌다. 상대는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퇴각할 선택지가 있으니, 상황이 나빠지면 퇴각할 것이다."
이 예측이 상대의 행동을 결정한다. 그리고 상대의 행동이 결국 나의 운명을 결정한다.
코르테스가 배를 불태운 순간 일어난 일은 군사적 사건이 아니라 인식론적 사건이었다. 아즈텍과 원주민 부족들의 머릿속에 있던 '저들은 후퇴할 수 있다'는 전제가 지워진 것이다. 그 전제가 지워지자, 그들의 전략 계산 전체가 다시 쓰여야 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 명량 출정 직전의 이순신 장군
투자에서도 같은 원리가 작동한다. 경영자가 자사주를 대량 매입하는 행위, 창업자가 보유 지분을 한 주도 팔지 않는 행위-이것들은 시장 참여자들의 머릿속에 있는 '이 사람은 언제든 빠져나갈 수 있다'는 전제를 지우는 인식론적 사건이다. 코르테스가 배를 파괴한 것과 구조가 같다.
세계관의 전환
전통 경제학은 세계를 '효용의 극대화'로 이해한다. 마치 혼자 앉아서 수학 문제를 푸는 학생처럼, 주어진 제약 아래 최적의 답을 찾는 일.
게임이론은 세계를 다르게 본다. "개인은 다른 개인들의 최적화를 예측하며 자신을 최적화한다". 혼자서 문제를 푸는 학생의 세계엔 타자의 생각이 존재하지 않는다. 객관적 제약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게임이론의 세계엔 타자의 뇌 속 내용이 결정적 변수가 된다.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상대가 내가 상대를 어떻게 생각한다고 생각하는지. 이 무한히 중첩되는 거울의 방이 현실을 구성한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믿음일까. LA에서 흥미롭게 봤던 작품 (출처: Yayoi Kusama, 'Infinity Mirrors')
그래서 게임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무엇이 사실인가'가 아니다. '무엇이 공유된 믿음인가'다.
코르테스의 배가 실제로 불탔는지보다 원주민들이 "스페인은 후퇴할 수 없다"고 믿는지가 더 중요하다. 북한이 실제로 핵무기를 쏠 수 있는지보다 주변국이 "북한은 쏠 수도 있다"고 믿는지가 더 중요하다. 중앙은행이 실제로 인플레이션을 잡을 의지가 있는지보다, 시장 참여자들이 "중앙은행은 잡을 것이다"라고 믿는지가 더 중요한 것이다.
실재는 믿음의 균형 위에 얹혀 있다. 그리고 그 균형이 흔들리면, 실재가 흔들린다.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으니 구체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왜 국가들은 핵무기를 만들고도 쓰지 않는가. 핵무기의 진짜 용도는 쏘는 것이 아니다. "쏠 수 있다"는 사실을 상대가 믿게 만드는 것이다. 쏘는 순간 게임은 끝난다. 쏘지 않고 가지고 있는 동안에만, 상대의 행동을 계속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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