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는 비키니 같다. 드러낸 부분은 도발적이지만, 감춰진 부분이 치명적이다(Statistics are like a bikini. What they reveal is suggestive, but what they conceal is vital.) - 경제학자 아론 레벤스타인
들어가며
지난 칼럼에서는 인플레이션이 실제로 가진 의미와 무게감에 대해서 살펴보았죠. 그리고 인플레이션을 측정하는 가장 대표적인 지표가 소비자물가지수(Consumer Price Index, 이하 CPI)인데요. CPI는 미국 노동통계국(Bureau of Labor Statistics, 이하 BLS)에 의해 무려 1913년 처음 발표되어 100년이 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매달 10~15일 사이에 발표되며, 발표 시각은 미국 동부 시간으로 오전 8시 30분, 한국시간으로 (미국 서머타임 적용 기준) 오후 9시 30분입니다.
이렇게 BLS가 소비자물가지수 수치를 발표하는 날이면 전 세계 금융시장이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예상치를 크게 벗어난 CPI가 발표되면 주식시장은 급등하거나 급락하고, 채권 수익률은 크게 요동치며, 외환시장에서는 달러화가 등락을 거듭합니다. 그야말로 금융시장 전체가 단 하나의 경제지표에 따라 출렁이는 것으로, 미국의 물가가 전세계의 투자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하지만 CPI는 단순히 금융시장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CPI는 실생활의 다양한 영역에서 금액 책정의 척도로서 폭넓게 활용되는데요. 예를 들어 사회보장급여의 인상률은 매년 CPI에 따라 조정되는데, 이 말인즉슨 CPI 상승률이 낮게 계산되면 연금 수령자의 실질 소득이 감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수많은 기업들이 임금 인상률을 결정할 때 CPI를 참고하기 때문에, 사실상 평균 연봉을 CPI가 좌우한다고 봐도 무방하죠. 심지어 이혼 위자료나 자녀 양육비를 산정할 때도 CPI가 고려됩니다. 그래서 CPI는 생활 경제의 기준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CPI는 경제의 건강 상태를 진단하는 체온계 역할을 하는데요.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 체온이 정상 범위를 벗어나면서 문제가 있다고 경고를 보내듯이, CPI가 연준의 목표치인 2%를 크게 벗어났다는 것은 경제에 문제가 생겼다는 시그널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CPI는 단순한 통계 수치가 아닌, 경제의 건강을 알려주는 검진 보고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CPI의 기초
CPI의 기본 개념은 의외로 단순한데, 우리가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재화와 서비스가 하나의 장바구니에 담겨 있다고 가정하고, 이것이 얼마나 변했는지를 측정하는 것이죠. 다만 CPI는 개인의 장바구니가 아닌, 미국의 도시 가구들이 평균적으로 소비하는 모든 품목들을 포함하는 거대한 장바구니, 즉 CPI 바스켓의 가격 변화를 측정합니다. 식료품부터 주거비, 의료비, 교육비까지, 도시 가구가 지출하는 거의 모든 비용이 이 바스켓에 포함되어 있죠. 매달 BLS는 전국 75개 도시 지역에서 약 24,000개의 소매점과 서비스 업체를 방문하여 80,000개가 넘는 상품과 서비스의 가격을 조사하는데, 이를 8가지 대분류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식품 및 음료
주거
의류
교통
의료비
여가비
교육 및 통신
기타
그러나 모든 항목이 동등한 중요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며, 항목별 가중치가 다릅니다. 그리고 각 항목의 가중치는 임의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 지출 조사Consumer Expenditure Survey를 통해 2년마다 조정되는데요. 예를 들어 평균적인 미국 가구가 소득의 40%를 주거비로 지출한다고 소비자지출조사가 나왔다면, CPI에서도 주거비의 가중치는 40%가 되는 식입니다.
이렇게 모든 항목의 가중치를 설문을 통해서 정했다면, 각각의 항목의 가중치에 해당 항목의 가격 변화율을 곱해서 전체 CPI에 반영합니다. 예를 들어 주거비가 0.5% 상승했고 주거비의 가중치는 40%라면, 이는 전체 CPI를 0.2%p(0.5% × 40%) 상승시킵니다. 이런 식으로 모든 항목의 가격 변화가 각각의 가중치와 곱해져서 합산되면 최종적인 CPI 상승율이 나오는 것이죠. 어느 대학생의 최종 성적을 구할 때, 각 과목의 점수와 학점을 곱한 뒤 합산하는 것처럼, CPI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계산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각 항목이 CPI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 있는지 분석하여 기여도를 측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전체 CPI가 0.3% 상승했다 하더라도, 이것이 광범위한 물가상승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특정 항목의 일시적인 가격 급등에 불과한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항목별 기여도를 확인해 봐야 합니다. 또한, 어떤 항목이 변화한 것인지도 중요한데요. 가령 CPI 상승의 주 원인이 에너지인지, 주거비인지, 의료비인지에 따라 연준의 정책 대응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밸리 AI에서 제공하는 CPI의 항목별 변화율
여기서 더 고려해 봐야하는 부분은 CPI의 각 구성 항목이 다시 수많은 세부 항목으로 나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식품 항목은 '가정 내 식품'과 '외식'으로 나뉘어지고, 가정 내 식품은 다시 '시리얼 및 베이커리 제품', '육류', '유제품', '과일 및 채소' 등으로 세분화될 수 있습니다. 또한 주거비는 '임대료', '주택소유자 등가임대료', '주택 수리비', '수도광열비' 등으로 구분됩니다. 이처럼 CPI는 층층이 쌓인 계층적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통해 물가 변동의 세세한 부분까지 포착할 수 있습니다. 이를 일일이 설명하자면 길어질 수 있는데, 상세한 내역은 글 마지막의 보론에서 소개하겠습니다.
CPI 산출에 있어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기준년도Base Year 설정입니다. 현재 미국 CPI는 1982-84년을 100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CPI값은 1982-84년 대비 얼마인지를 나타내는데요. 가령 2024년 10월의 CPI는 314.69인데, 이것은 1982-84년 대비 10월의 물가는 3.14배 정도로 상승했다는 의미입니다.
2018년 이후의 CPI의 추이
이렇게 1982-84년을 기준년도로 설정하고 있는 이유는 이 시기가 미국 경제에서 매우 특별한 전환점이었다는 점입니다. 글로벌 매크로 실전편에서도 다루고 있지만,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는 미국이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었던 시기였습니다. 이를 제어하기 위해서 당시 폴 볼커 연준 의장은 기준금리를 20%까지 올리는 극단적인 긴축정책을 실시했고, 그 결과 1982-1984년 무렵부터 인플레이션이 안정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는 70년대의 '대 인플레이션Great Inflation'이 끝나고 사반세기 동안 이어질 '대 안정기Great Moderation'가 시작되는 변곡점이었습니다. 1982-84에 경기가 안정을 찾고나서 2008년 금융위기 전까지 인플레이션이나 대대적인 경기침체 없이 안정적인 경제 환경이 펼쳐지게 되었던 것이죠.
또한 이 시기는 미국 경제의 구조적 전환기이기도 했습니다. 레이건 행정부의 감세 정책과 규제 완화, 그리고 공급중시 경제정책이 본격화되었고, 미국 경제는 제조업 중심에서 서비스업 중심으로 전환되기 시작했습니다. 소비 패턴도 크게 변화했는데, 베이비부머 세대가 본격적으로 경제활동에 참여하면서 새로운 소비문화가 형성된 것도 이 시기죠.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1982-1984년은 의미 있는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 노동통계국은 CPI 측정 방식을 대대적으로 개선했는데요. 특히 주택 가격을 측정하는 방식이 크게 변경되었는데, 이전까지 주택 구입 비용을 직접 반영하던 방식에서 주택소유자 등가임대료(OER) 방식으로 전환했습니다. 이는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중요한 변화였습니다. 또한 이 시기는 데이터의 품질과 신뢰성 측면에서도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컴퓨터의 보급으로 보다 정확한 가격 데이터 수집이 가능해졌고, 표본 설계와 통계 처리 방식도 크게 개선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1982-1984년 이후의 데이터는 그 이전보다 훨씬 더 신뢰할 만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기준연도가 40년 넘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물가지수의 기준연도는 주기적으로 변경되는 것이 보통인데, 미국 CPI는 이례적으로 오랫동안 같은 기준연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시계열의 연속성과 비교가능성을 중시하는 미국의 통계 철학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한편, 비교 시점도 달리 잡아볼 수 있는데요. 총 2개가 존재하며 각각 전월 대비(MoM), 전년 동월 대비(YoY) 지표입니다. MoM은 지금 당장의 흐름을 보기에는 좋지만, 아무래도 계절적 요인이나 일시적 요인에 의해 널뛰기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주로 YoY를 보게 되는데요. YoY는 딱 365일 전과 비교해서 물가 상승률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자는 것으로, 1년 간격이라는 점에서 계절적 요인 같은 것들도 어느 정도 여과가 되죠. 다만 1년 누적치이기 때문에 최근 몇 달 간의 추이를 읽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MoM과 YoY를 상호 보완적으로 같이 보는 것이 좋겠죠. 아울러 MoM을 ‘연율화’ 하기도 하는데요. 이것은 한달의 CPI 변화율에 12배를 곱해서 연간 규격으로 환산해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2024년 1월 한달 동안 CPI가 전월대비 0.3% 상승했을 경우, 여기에 12를 곱해서 3.6%로 연율화를 해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번 달 페이스로 1년 내내 물가가 오르면 3.6%의 물가 상승률이 나온다’는 뜻이죠.
MoM으로 본 CPI와 YoY로 본 CPI의 비교. YoY 쪽이 중단기적인 추세를 더 잘 드러낸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YoY라고 하더라도 비교 대상이 되는 시점의 수치가 특이하게 높거나 낮을 경우, 현재의 CPI 상승률이 왜곡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작년 6월에 유가가 급등했다가 이후에 정상화되었다면, 올해 6월의 YoY CPI는 ...